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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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를 홀로 간호하며 사실상 가장으로 살고 있는 14세 민호(가명)는 느닷없이 2600만원을 갚으라는 카드회사의 독촉장을 받았다. 민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이혼하고 집을 나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민호가 아버지 카드빚을 상속받게 된 것이다. 빚 갚을 여력은커녕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든 민호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의 채무로 인해 순식간에 개인파산 위기에 놓이게 됐다.

물려받은 빚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 결손가정과 극빈층에 해당하는 사례가 많아 “법적 보호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빚더미 상속받는 미성년자들

"얼굴도 못 본 아빠 빚 저한테 갚으래요"
22일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시복지재단 산하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에서 지원하는 미성년자 채무 상속 관련 법률 상담 건수가 이달 현재 누적 107건으로 집계됐다. 지난 2월 법률 상담 지원을 시작한 뒤 6개월 만에 100건을 넘어선 것이다. 상담에서 실제 소송으로 이어진 것은 30건에 이른다.

현행법상 피상속인이 사망할 경우 재산뿐 아니라 채무도 함께 상속자에게 넘어간다. 상속인이 과도한 빚을 넘겨받지 않기 위해선 ‘상속개시(사망)’를 알게 된 날로부터 3개월 내 법원에 ‘상속포기’ 또는 ‘한정승인’을 신청해야 한다.

상속포기는 상속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재산·빚 모두 후순위 상속인에게 넘어간다. 한정승인은 상속받은 재산 한도 내에서만 빚을 갚는 것을 뜻한다. 빚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을 때는 그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3개월 내에 ‘특별 한정승인’을 신청하는 제도도 있다.

하지만 “만 19세 미만 미성년자의 경우 이 같은 장치를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미성년자 본인이 아닌, 법정 대리인이 인지한 시점을 기준으로 상속포기나 한정승인 신청기한을 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동한 법무법인 열림 변호사는 “아이는 빚을 상속받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더라도, 한부모나 조부모 등 법정 대리인이 인지한 뒤 3개월이 넘으면 상속포기 또는 한정승인을 신청할 수 없어 구제받을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설명했다.

“결손가정·극빈층 빚 상속 막아야”

공익법센터에는 미성년자 본인도 모르게 빚이 상속돼 뒤늦게 법률상담을 받는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부모가 이혼하거나 사망해 조부모와 함께 살고 있거나, 장애인 편부모를 둔 아이, 시설에 맡겨진 아이 등 취약계층이 대부분이다.

이상훈 공익법센터장은 “부모가 이혼해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여덟 살 아이가 사망한 아버지의 빚을 떠안게 된 사례도 있다”며 “어린아이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혼한 어머니가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결국 채권자로부터 재산을 압류당하거나 개인파산을 신청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미성년자의 과도한 채무 상속을 막는 제도적 보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보고서에서 “독일, 프랑스 등은 미성년 상속인을 보호하는 특별규정을 두고 있다”며 “한국도 미성년자가 상속재산 이상의 채무를 승계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입법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최근 빚 대물림 방지와 관련한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