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겪었던 제주도 형제, 6·25전쟁 발발에 학도병으로 입대
결혼 직후 참전한 형, 수개월만에 전사…동생은 무훈 세우고 7년 동안 군 복무
동생 안택봉 씨 70년만에 화랑무공훈장 받아…'제주판 태극기 휘날리며'로 불려
[70년만의 무공훈장]② 나라 위해 전장에 뛰어든 형제…형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탐사보도팀 = 2004년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 전쟁에 함께 참전한 형제의 이야기를 다뤘다.

전쟁 중 형은 전사하고, 동생만 살아남아 노인이 된 뒤 형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는 것이 주된 줄거리이다.

제주도에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닮은 사연을 가진 형제가 있다.

6·25 전쟁에 참전한 고(故) 안택영, 안택봉(89) 형제가 그들이다.

형제는 각각 22살과 19살에 입대했다.

형은 강원도 원통지구에서 전사했고, 동생은 1956년 전역했다.

형제는 모두 화랑무공훈장 수훈자였지만, 안택봉 씨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은 전쟁 발발 후 70년 만인 지난해 6월 25일 안 씨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지난 2019년 창설된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은 6·25 참전용사 중 무공훈장을 수령하지 못한 이들을 찾아 훈장을 수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탐사보도팀은 지난달 24일 제주도 제주시 삼양일동에 사는 안 씨를 직접 만나 전쟁 중 그가 세운 무훈(武勳)을 듣고, 그의 삶에 새겨진 한국 현대사의 흔적을 취재했다.

안 씨는 58세에 발생한 뇌출혈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어 딸 희정(55) 씨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70년만의 무공훈장]② 나라 위해 전장에 뛰어든 형제…형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 제주도 시골 소년, 4·3사건 직후 학도병으로 징집되다
안택봉 씨는 육지를 오가며 대나무 장사를 하던 아버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신설된 삼양소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인 선생은 허리에 칼을 차고 교실에 들어왔고, 일본어로 수업을 듣고 말해야 했다.

6학년 때 해방의 기쁨을 맞은 뒤 육지에서 온 부부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안 씨는 1946년 신설된 제주중학교에 입학했지만, 2학년까지 다니다가 제주 4·3 사건이 터져 학교가 폐쇄돼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동네 청년들은 길에서 보이면 무조건 잡혀갔고, 이에 다들 숨어버렸다.

어린 학생들은 학도단 활동으로 당번을 정해 보초를 섰다.

산사람들의 습격을 받아 집과 학교가 불타고 사람들이 죽던 날 밤. 안 씨가 당번을 서고 있었는데 갑자기 총소리와 비명이 들리더니 총 든 사람들이 방에 들이닥쳤다.

"손 들고 돌아서!"
안 씨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우리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라고 외쳤다.

"잠깐!"
생사의 갈림길에서 안 씨가 아는 선배 목소리가 들렸다.

그 선배의 만류로 무사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매캐한 연기 속에서 그들이 다 죽었을 거로 생각한 동네 사람들과 안 씨의 어머니가 들것을 들고 왔다.

살아남은 그들을 보고 어머니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군경의 토벌과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이 불타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해안마을로 내려온 사람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방이 부족해 안 씨의 집 마당에 움막을 지어 주민들이 함께 지냈다.

4·3 사건 당시 안 씨는 나이가 어려 다행히 위기를 면했지만, 제주도민 모두가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비극적인 시기였다.

[70년만의 무공훈장]② 나라 위해 전장에 뛰어든 형제…형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6·25 전쟁이 발발했고, 청년들이 징집됐다.

결혼해 갓 난 딸 하나 두고 일제 징용으로 남양군도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큰 형님, 농업학교에 다니다가 결혼한 지 몇 달 안 된 신혼의 둘째 형님, 어머니 눈에는 아직 작고 어리게만 보이는 철부지 막내아들인 안 씨까지 모두 징집대상이 됐다.

아들 셋을 고스란히 전쟁터로 보내게 되자 안 씨의 어머니는 같은 동네 출신 부읍장에게 "제발 아들 하나는 빼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큰 형님을 빼기로 하고 둘째 형님과 안 씨가 징집됐다.

둘째 형님은 부두에서, 안 씨는 제주농업학교에서 동네 형들, 친구들과 모여 육지로 출발했다.

4·3 사건 발생 이후 제주도민은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던 시절이어서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제주도민 청년 대부분이 나이만 되면 모두 입대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청년이 참전했는지 커다란 배에 가득 실어 육지로 날라야 했다.

◇ 일병 시절, 전우들과 함께 인민군 장군을 사살하다
1950년 학도병으로 소집돼 입대했을 때 안 씨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대구에서 12사단 9연대 1중대 이등병으로 배치받았다.

1952년 일병으로 진급 후 21연대 6중대장 연락병으로 지리산 전투에 참전했다.

6중대는 제주도민으로 대부분 이뤄진 부대였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과 한국군이 밀고 내려가자 인민군이 후퇴하는 상황이었다.

안 씨가 속한 부대는 반대로 밀고 올라가 인민군을 소탕하는 작전을 펼쳤다.

인민군 패잔병들은 주로 전라도와 대구에 남았다.

기습작전을 펴기로 한 안 씨의 중대는 저녁부터 지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 험하고 어두운 산지를 조심조심 올라갔다.

안 씨는 같은 동네 출신 백모 형님이 자꾸만 앞서가자 걱정되는 마음에 같이 가자고 불렀다.

새벽녘까지 걷고 걸어 정상 가까이 왔나 싶었다.

산속에 초가가 몇 채 보였다.

포위망을 좁히며 더 가까이 다가가니 "암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돌진했다.

적은 새벽녘에 기습을 당하자 전열을 채 가다듬지 못하고 혼비백산해 흩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곧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백모 형님도 총에 맞았다.

인민군은 어느 순간 총알을 다 쓴 것 같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고립됐던 탓에 실탄이 많이 없었던 모양이다.

뒤이어 어둠 속에서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치열한 육탄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제주도 출신의 두 어린 병사가 죽었다.

아군의 피해도 있었지만, 적이 훨씬 많이 죽었다.

무엇보다 당시 인민군 남한 총사령관이었던 박달 장군을 사살할 수 있었다.

사로잡은 포로들을 데리고 지리산에서 내려와 광주까지 호송했다.

부대로 복귀한 후 며칠이 지나자 중대장이 안 씨를 불렀다.

중대장은 "자네 중학교에 다녔다면서?"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그럼 추천해줄 테니 대구로 가서 장교 교육을 받고 장교 시험을 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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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고지 전투 때 부상…7년 청춘 군에 바치다
안 씨는 6개월간 갑종 23기 사관후보생 과정 교육을 마치고 1952년 7월 19일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해 최전방으로 갔다.

소대장으로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6ㆍ25 전쟁 때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이곳에서 고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어느 날 식사 중에 포탄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산에서 포탄이 터지니 흙이 가루가 되어 튀어 올랐다.

곧바로 소대를 이끌고 산 위로 올라가 보니 바로 코앞 마주 보이는 봉오리에 중공군이 새까맣게 포진해있었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알과 포탄 속에서도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소대원을 지휘했다.

격렬하게 싸우던 중 방아쇠를 당기던 오른팔에 포탄 파편이 날아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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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한 팔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눈앞이 하얘지더니 정신을 잃었다.

연락병이 달려와 자기 옷을 찢어 안 씨의 팔에 감아 지혈했다.

정신은 차렸지만, 부상으로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 했다.

이날 전투에 두 개 중대가 참여했으나 거의 전멸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포탄에 찢긴 시신이 참호 속에 처참히 널브러져 있었다.

여름철이라 냄새도 심했다.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다리가 시신 사이로 푹푹 빠질 정도였다.

시신 무더기 사이에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병사가 한 명 눈에 띄었다.

부상을 대충 처치한 후 데리고 내려와 마산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했다.

부상병은 트럭을 타고, 장교는 별도의 차를 타고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장교 한 사람이 안 씨에게 "이렇게 어린 사람이 장교야?"라며 계급장을 확인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마산수도육군병원은 부상자들로 꽉 차 있었다.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 피범벅이 된 부상병의 고통스러운 신음.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팔에서 파편을 꺼내고 5개월을 입원하니 상처가 거의 아물었는데, 한 장군이 와서 말했다.

"일반 부상병이라면 귀가 조처하겠지만, 장교들은 배출하는 데 시간이 걸리오. 총을 쏠 수 있으면 가급적 일선으로 가 주시오. 전쟁이 끝나면 당신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증명해주겠소" 하면서 '특별상이용사증'을 발급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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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씨는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 대대에 배치된 뒤 1953년 22세에 광주 초등군사반에서 갑종간부교육을 받고 중위가 됐다.

중대장으로서 대대 보급관이 돼 쌀이나 부식, 밥 등을 각 중대에 보급했다.

이후 전투는 많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전을 맞았다.

1956년 6월 안 씨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에서 결혼이 늦어진다고 걱정하기도 해 제대 희망 신청을 했다.

당시 계급은 중위였다.

19세에 나라의 부름을 받고 학도병으로 입대해 20대 중반까지 7년여 청춘을 군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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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한 형님, 유해는 끝내 찾지 못하다
안 씨는 제대 후 한동네에 살며 우체국에 다니던 아내와 결혼해 3남 2녀를 낳았다.

아내와는 중학교 다닐 때 등굣길에 가끔 마주치곤 했지만, 어릴 때라 인연이 될 줄 몰랐다고 한다.

제대 후 잠시 세무서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20대 후반에 삼양1동장으로 선출됐다.

5·16 쿠데타 후 삼양 5개 동이 합쳐진 뒤에는 삼양동 초대 동장이 됐다.

어선을 사서 운영하기도 했지만, 우체국 중대장, 삼양동 중대장, 삼양명예파출소장 등 월급도 거의 없는 바깥일에만 신경 쓰다 보니 배를 팔아야 했다.

집안일은 거의 돌보지 못했다.

사실상 아내가 다섯 아이를 키워냈다.

아내는 아동문학 출판사인 계몽사의 초대 여성 외판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아내는 50대 후반에 뇌출혈로 쓰러진 안 씨를 돌보느라 고생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안 씨는 '특별상이용사증'이 있어도 등록할 생각을 안 했다.

가끔 만난 전우들은 "남들은 다 하는데 왜 안 하느냐"고 했지만, 팔다리가 잘릴 정도의 심각한 장애가 남은 것도 아니고 젊기에 자신감도 있어 등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 등록했더라면 다섯 아이의 학비로 힘들었던 시기에 장학금 혜택이라도 받아 아내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함께 군에 갔던 둘째 형님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입대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1951년 3월 10일 횡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충혼묘지에 유품을 묻어드렸지만, 유해는 찾을 수 없었다.

형님의 전사 소식은 같은 동네 사는 전우가 휴가를 나왔다가 가족들에게 전해줘 알게 됐다.

형님은 자식 없이 돌아가셔서 안 씨가 제사를 모셨다.

지금은 안 씨의 아들이 조카로서 제사를 이어가고 있다.

[70년만의 무공훈장]② 나라 위해 전장에 뛰어든 형제…형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안 씨는 형제가 무공훈장 수훈자라는 사실을 국가에서 알아내 훈장을 전해준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고 한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참전했고, 보답받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훈장을 받는다고 하니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는 둘째 형님이 형제 중 가장 잘 생기고 똑똑했다고 회상했다.

"형님이 살아계셨다면 직접 말해주실 수 있었겠지만, 관련 기록조차 없어 왜 수훈자가 됐는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6·25 전쟁 71주년을 맞는 심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에 힘을 보태는 일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하다.

하지만 다시는 동족끼리 총을 겨눠야 하는 참담한 세상은 없어야 한다.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피 흘리게 만드는 그런 비참하기 짝이 없는 전쟁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우리 자손들에게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평화로운 땅을 소중히 물려줘야 한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