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로스쿨' 캡처.
JTBC 드라마 '로스쿨' 캡처.
# 직장여성 이예린(가명)씨는 어느 날 유부남인 상사로부터 탁상시계를 선물 받았다. 이 씨는 선물 받은 시계를 침실에 두고 사용했지만 깜빡 거리는 불빛이 신경쓰여 옆으로 치웠다. 다음 날 상사는 시계를 돌려달라고 했고, 집으로 돌아간 이 씨는 검색을 통해 이 시계가 몰카라는 것을 알았다. 상사는 한 달 동안 이 씨의 모습을 불법 촬영해 핸드폰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씨는 판사로부터 합의를 종용 받았고 가해자인 직장 상사는 징역 10개월을 받았다. 사건 발생 후 1년이 지났지만 이 씨는 우울증과 불안감에 치료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지난 16일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를 공개,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입은 한국 여성 38명의 인터뷰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경찰, 검찰, 법원과 같은 수사 및 사법 기관에서 2차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한 피해자는 "때론 범죄 자체보다 경찰의 대응 방식에 더 상처를 받는다"고 비판했다.

2019년 검찰은 성범죄 사건의 46.8%를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같은 기간 불법 촬영과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불법 촬영물 제작·유포 사건에 대한 불기소 처분율은 43.5%로 조사됐다.

성범죄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처분율은 살인 사건(27.7%)이나 강도 사건(19.0%)의 불기소 처분율을 두 배 가까이 웃돌았다.

2017년 디지털 성범죄로 체포된 가해자 5437명 중 2.2%(119명) 만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검찰이 기소해 재판이 진행되더라도 법원이 선고한 형량 역시 피해의 심각성에 비해 가벼운 수준이라고 이 보고서는 주장했다.

헤더 바 HRW 여성인권 임시 국장은 "한국에서 너무 흔한 것이 디지털 성범죄"라며 "많은 여성들이 공중 화장실 사용을 피하고 집에서도 몰카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부분의 가해자에게 선고되는 형량은 지나치게 낮아 피해자들이 신고를 포기하게 만들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경우에도 이 범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주로 남성인 수사·사법 기관 관계자들은 디지털 성범죄를 심각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며 "피해자들은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범죄에 대해 대처해야 했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수사·사법 기관 담당자들에게 디지털 범죄의 심각성과 성인지 감수성, 젠더 폭력의 영향 등에 대해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불법 촬영물 삭제를 위한 비용과 책임을 가해자에게 부과하고, 피해자들이 불법 촬영물 삭제와 심리치료 등으로 경제적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방안을 내놨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