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는 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각하 판단을 내리자 예상 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재판부가 지난달 28일 열린 1회 변론기일에서 “관련 사건이 대법원 재상고심 판결을 받은 만큼 법리적·사실적 쟁점들이 정리됐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日징용 피해자, 청구권 있지만 소송권은 제한"
이에 따라 법조계에서는 “원고 승소 판결이 내려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재판부는 일본 기업 측 대리인들의 “원고 측 주장은 입증이 안 됐다” “사실관계 주장 자체가 부실하다”는 등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징용 판결에 법조계 “예상 밖”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4부(부장판사 김양호)는 7일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볼 수는 없어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송을 통해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판결은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과 상반된다. 당시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일본 기업들이 1인당 1억원씩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한 서울고등법원 판사는 “재판부가 과거 대법원 판결을 거스른 것 자체를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며 “양심적 병역거부 판결도 이와 비슷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줄줄이 뒤집히는 ‘한·일 관계 판결’

최근 들어 한·일 관계에 민감한 판결은 연달아 뒤집히는 추세다. 지난 4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5부는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여 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각하 결정을 내렸다.

이는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가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과 다른 결론이다. 당시 재판부는 “국제법상 ‘국가면제’를 어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국가면제란 ‘국제관습법상 다른 나라 정부를 피고석에 세우는 소송은 불가능하다’는 원칙이다.

이번 강제징용 판결도 “‘공공복리’에 따라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법리를 적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재판부는 “이 사건 청구를 인용하는 것은 빈협약 27조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헌법상 원칙인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도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 즉각 항소키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2012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자 잇따라 비슷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인해 앞으로 이어질 재판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법률사무소 월인의 채다은 변호사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행사할 수 없는 권리를 권리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소송은 오는 10일 선고가 예정돼 있었으나, 재판부가 갑자기 이날 오전 선고 일정을 앞당기겠다고 원고와 피고 양측에 통보했다. 재판부는 “선고기일 변경을 당사자에게 고지하지 않더라도 위법하지 않다”며 “법정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선고기일을 변경하고 소송대리인들에게 전자 송달과 전화 연락 등으로 고지했다”고 설명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즉각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