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수호신 모신 궤네기동굴…4·3 이후 신앙민 발길 끊겨
'종교 공간이자 문화재' 제주신화 이해하려면 신당 알아야

"이름난 장수가 날 명당이 어딘가 보자. 김녕리가 명당 중의 명당이로다!"
[다시! 제주문화](11) 선사시대 유적 제주 동굴이 신당 된 사연
김녕 마을 수호신인 '궤네기또'가 자신이 좌정할 곳을 발견한 뒤 내뱉은 말이다.

'이름난 장수'라 하면 바로 궤네기또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제주에는 1만8천에 이르는 많은 신들이 있으니 이 중에 '장수' 출신 신(神)도 있을 법하다.

어떤 사연, 어떤 영웅담이 담겨있을까.

궤네기또와 관련한 당신화는 제주 본향당의 원형이 살아있는 송당마을 본풀이와 연결돼 있다.

궤네기또는 제주 구좌읍 송당리 당신인 '소천국'과 '백주또' 사이에서 나온 여섯째 아들이다.

그는 3살 무렵 아버지 소천국의 미움을 받아 무쇠로 된 상자에 담겨 바다로 버려졌다.

오랜 세월 상자에 갇혀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궤네기또는 용왕국에까지 이르게 됐다.

상자에서 나온 궤네기또는 용왕국 황제의 눈에 들어 황제의 딸을 아내로 삼은 데 이어 강남천자국에 가서는 난리를 평정해 나라를 구했다.

강남천자국의 왕이 벼슬을 내리고 땅을 주며 남으라고 했지만, 궤네기또는 이 청을 거절하고 제주에 돌아와 김녕마을에 좌정해 당신(堂神)이 됐다.

영웅적 기질을 가진 인간이 험난한 모험 끝에 신이 되는 이야기다.

아주 짧게 요약했지만, 제주의 당신화 중에서도 비교적 내용이 풍부하고 서사구조가 잘 짜여 있다.

이처럼 용왕국과 강남천자국에서 이름을 떨친 궤네기또가 좌정한 신당은 어떤 곳일까.

[다시! 제주문화](11) 선사시대 유적 제주 동굴이 신당 된 사연
화산섬 제주의 특징과 제주 사람들의 생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궤네기동굴'이다.

제주에서는 바위굴을 '궤'라고 하는데 궤네기또란 이름 역시 이 말(궤)에서 비롯됐다고 하기도 한다.

제주어 사전으로 '궤'를 찾아보면 '큰 바위나 절벽 따위로 가려지고 땅속으로 깊숙하게 패어 들어간 굴'이라고 설명한다.

공간의 크기와 상관없이 한두 사람이 비를 피할 정도의 작은 공간도, 수십 명이 들어갈 만한 커다란 바위굴도 제주에선 모두 '궤'라고 일컫는다.

넓적한 아치형 모양의 입구에서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며 휘어져 들어간 궤네기동굴의 전체 길이는 200m, 내부 폭은 7∼9m, 바닥 면적은 60여㎡가량이다.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은 지난 1991년부터 3년간 이곳을 발굴 조사했다.

당시 동굴 안에서 무문토기·적갈색토기 등 토기류와 돌칼과 같은 석기류, 전복껍질 화살촉 등 많은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됐다.

이처럼 생활하는 데 필요한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미뤄 궤네기동굴은 기원 전후한 시기에서 기원 500년까지 사람들이 거주했던 유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정 기간 주거 용도로 사용되다 훗날 마을이 형성된 뒤부터는 신이 좌정한 종교적 공간으로서 신성시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제주문화](11) 선사시대 유적 제주 동굴이 신당 된 사연
특히, 입구에는 수령이 400년 가까이 된 팽나무가 동굴 전체를 감싸고 있어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로 신목(神木)이다.

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물체(신체, 神體)로서 나무와 돌 등이 사용되는데 이를 신목, 신석이라 일컫는다.

궤네기동굴은 마을 수호신인 '궤네기또'가 좌정한 신당이라는 의미에서 '궤네깃당'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궤네기또'가 가뭄에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고, 먼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할 때는 풍랑을 잠재워주는 등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제주 사람들에게 자신과 가족,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는 당신에 대한 믿음, 신앙은 '생존'과 직결하는 매우 간절한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돼지를 잡아서 신에게 제물로 올리는 '돗제'(豚祭)를 지냈다.

신화에서 궤네기또는 바닷속 용왕국에서도 소 한 마리와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 등 식성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이 가난한 백성들의 사정을 헤아려달라며 돼지를 잡아 바치겠다고 하자 궤네기또가 그 청을 받아들였다.

동굴 안에는 제물을 올릴 수 있도록 돌로 된 선반이 있어 안에서 제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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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식을 마무리한 뒤에는 돼지고기로 죽을 쑤고, 고기 일부를 마을 사람들이 함께 골고루 나눠 먹었다고 한다.

돼지고기 한 점 먹기 힘들었던 그 옛날 신당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결속은 더욱 단단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돗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1900년대 초중반까지도 이어졌지만, 제주에 불어닥친 4·3 광풍으로 인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사실상 '폐당'에 이르렀다.

현재 궤네기동굴 출입구에는 철문으로 가려져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제주도지사 명의의 안내 팻말은 '오랜 기간 주거 유적과 신앙 유적의 성격을 갖는 제주에서 보기 드문 유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돼 보호 관리하고 있다.

동굴 내부 천정과 용암종유, 동굴산호의 보호 관리를 위해 동굴 출입을 금지한다'고 알리고 있다.

동굴 출입은 금지됐지만, 여전히 마을 사람들 사이에 무속신앙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임시찬 김녕리장은 "옛날과 달리 지금은 동굴에서 제를 올리진 않지만, 각 가정에서 신을 모시고 돗제를 하며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처럼 정기적으로 제를 올리는 것은 아니다.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축하할 만한 일이 있을 때 돗제를 지내고 있고 가끔 일본, 서울, 부산 등에서도 사람들이 와 함께 제를 지낸다"고 설명했다.

[다시! 제주문화](11) 선사시대 유적 제주 동굴이 신당 된 사연
제주전통문화연구소의 신당조사팀을 이끌며 제주의 신당 전수조사를 진행한 강정효 전 제주 민예총 이사장은 "궤네깃당의 기능이 사라져 지금은 마을 단골(마을 신앙민을 일컫는 제주어)이 찾지 않고 있지만, 그 명성을 듣고 찾아온 이방인들이 이곳에서 기도의식을 벌이기도 한다"며 "간혹 오방색 천을 나뭇가지에 내건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제주의 풍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전 이사장은 "제주의 신앙민들은 당에 갈 때 지전과 물색이라 불리는 소박한 제물만을 준비하기 때문"이라며 "'주인 떠난 자리에 나그네가 주인 행세를 하는 형국'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지금도 궤네기동굴 팽나무에는 오방색 천이 감겨 있다.

◇ 신당은 종교 공간이자 지역 문화재
제주신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당을 알아야 한다.

제주의 마을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본향신'(本鄕神)과 신을 모신 신당인 '본향당'(本鄕堂)이 있다.

[다시! 제주문화](11) 선사시대 유적 제주 동굴이 신당 된 사연
제주신화는 바로 제주 마을에 좌정한 신들의 이야기이며, 그 신앙을 중심으로 살아간 마을 주민들의 삶이 신화 속에 녹아들어 있다.

이방인, 젊은 사람들의 눈에 신당은 별 의미 없는 자연물일 뿐이다.

하지만 단골 마을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불행을 해결하고, 간절한 소망을 비는 신성한 공간이자 신화를 상징하는 실체적 공간이다.

이러한 본향당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가 결속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신당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자 종교 공간으로서 또는 문화재로서 신당을 보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2008∼2009년 제주도와 제주전통문화연구소는 공동으로 제주지역 신당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 390여 개의 신당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과거 제주에 '당(堂) 오백과 절(卍) 오백'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무속신앙과 불교가 번성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각종 난개발 등으로 인해 신당 수가 더 줄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 이 기사는 '제주 아름다움 너머'(강정효 저), '조근조근 제주신화 1·2·3'(여연·신예경·문희숙·강순희 저) 등 책자를 참고해 제주신화를 소개한 것입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