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 당시 유인물 제작 박용준 열사 조명…41주년 기념식 주제어 서체로
80년 5월 '투사회보' 글씨체가 '우리들의 오월'로 되살아났다
또박또박 정자로 쓰인 '우리들의 오월'
1980년 5월 항쟁 당시 투사회보를 작성한 고(故) 박용준 열사의 필체가 제41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주제어를 장식했다.

18일 5·18 기념재단에 따르면 박 열사는 들불야학 윤상원·박관현·박기순·신영일·김영철·박효선 열사와 함께 5·18 민주화운동을 이끈 '들불 열사' 7인 중 한 명이다.

1953년생이라는 그는 부모도 고향도 모르는 천애 고아였다.

고아원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구두닦이를 하면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외롭고 서러운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숭의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YWCA 신협 사원으로 취직한 박 열사는 1979년 들불야학과 인연을 맺어 교사로 활동했다.

27살이 되던 80년 5월 18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계엄군이 시위대를 잔혹하게 진압하자 박 열사는 야학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당시 신군부는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철저히 왜곡하거나 은폐했다.

군부에 장악된 언론도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이에 시민들은 확성기를 들고 차량에 올라타거나 휴대용 스피커를 통해 가두방송을 하며 진실을 알리려 했다.

들불야학에선 교재를 만들 때 쓰던 수동 등사기로 대자보를 쓰고 유인물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그렇게 들불야학의 투사회보는 시작됐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이뤄진 21일부터 만들어진 투사회보에는 계엄군의 만행과 시민들의 피해 상황을 담았다.

고립된 광주 시민들에게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알리는 역할도 했다.

5월 21일부터 25일까지 2만~3만 부씩 8호가 발행됐는데 박 열사는 정리된 문안을 손글씨로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80년 5월 '투사회보' 글씨체가 '우리들의 오월'로 되살아났다
'광주 시민의 민주화 투쟁 드디어 전국으로 확산되다', '광주 시민은 하나로 뭉쳐 더욱 힘을 내어 싸웁시다'
그가 쓴 투사회보의 부드러운 필체에는 결연한 투쟁의 의지가 담겼다.

25일부턴 박 열사가 근무했던 YWCA 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인원도 보강하고 기존의 수동식 등사기도 윤전기로 바꿨다.

투사회보 이름도 민주시민회보로 바꿔 9호를 26일 발행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발행본이었다.

최후항쟁 소식인 10호를 작성해놓고 재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을 막겠다며 죽음을 뻔히 알면서도 총을 들고 YWCA에 남았다.

결국 박 열사는 최후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 총탄에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친인척 하나 없는 고아였던 박 열사를 위해 매년 5월이면 YWCA 관계자들이 박 열사의 묘역을 찾아와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