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9) 삼국 통일전쟁
경기 연천군 임진강가에 세워진 고구려 강변방어체제 ‘호로고루성’. 서기 673년 당군과 호로하 전투를 벌인 곳이다.

경기 연천군 임진강가에 세워진 고구려 강변방어체제 ‘호로고루성’. 서기 673년 당군과 호로하 전투를 벌인 곳이다.

660년 당과 신라 연합군은 수륙양면군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 공략을 시도했다.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지만 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남부에서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동맹국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 간 공방전이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계속됐다. 663년 8월 나당 연합군과 백·왜 동맹군 사이에서 백강해전이 벌어졌다. 탐라의 수군도 참가한 치열한 전투였지만, 백·왜 동맹군은 참패를 당했다. 백제 유민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왜국은 나당 수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664년 해안가의 임시정청을 20여㎞ 내륙인 다자이후(太宰府)로 옮겼다. 이어 가네다성, 오노성, 기이성을 필두로 대마도, 규슈, 세토 내해를 거쳐 나라 지역까지 전략적 요충지마다 해양방어체제를 갖췄다. 모두 도호슌쇼(答春初) 등 망명한 백제 달솔(백제의 16관등 중 제2위 품관)들이 주도한 백제식 산성이다. 그리고 당과 화친 교섭을 시도했다.
700년 역사와 자유의지를 남긴 채 사라진 고구려
고구려는 백·왜 동맹군과 협동작전을 시도했으며, 666년을 비롯해 전쟁 중에도 여러 번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왜군은 고구려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외교활동이 활발했다는 증거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시 외곽의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에서 발견됐다. 강국(사마르칸트) 왕에게 온 외교사절 가운데 두 명이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고구려인이었다. 국제관계로 봤을 때 튀르크인이나 소그드인 상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테지만 초원과 산록, 사막을 지나 무려 4000여㎞를 행군한 것이다. 구국외교에 실패한 고구려인들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당나라는 667년 9월부터 고립무원인 고구려를 총력을 기울여 공격했다. 다음해인 668년 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에 압록강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고, 9월 수륙양면작전과 남북 협공을 받던 평양성은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함락당했다. 그러나 압록강 이북의 40여 성은 계속 저항했으며, 안시성은 671년 7월에야 항복했다. 고구려는 700년의 역사와 자유의지를 유산으로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70년간 벌어진 대전쟁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제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나라는 이용 가치가 떨어진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복속할 것을 압박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고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손잡고 육지와 해양에서 10년 가까이 ‘나당전쟁’을 벌였다.
백제·고구려 유민과 이뤄낸 통일
고구려 복국군은 한성(서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672년에는 신라와 연합해 백빙산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이어 673년 호로하(임진강 중류) 전투에서도 패했다. 신라군은 이런 상황들을 활용해 671년 10월 당나라의 군수선 70여 척을 격파했고, 673년에는 함선 100척을 서해에 배치해 방어했다. 675년 당군 20만 명을 매초성(경기 양주) 전투에서 궤멸하고, 676년 11월에는 기벌포(금강 하구) 해전에서 22번의 전투 끝에 당군 4000명을 괴멸시켰다.

결국 신라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은 서로 단결해 당나라군과 전쟁을 벌여 이민족을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동쪽 유라시아 세계에서 일어난 또 다른 질서의 재편이라는 유리한 환경도 작용했지만,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복수심에 불타 당나라 편에서 신라를 공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민족의 역사는 가정하기조차 싫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 있다. 고구려와 수·당 간에 벌어진 70년 전쟁은 동아시아 종주권을 둘러싼 종족 간의 대결, 문명의 대결이었으며, 무역권 쟁탈전의 완결판이었다(윤명철,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한민족 미래를 밝힐 삼국통일의 교훈
질문을 던진다. 안정적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왜 패배했을까? 신흥강국인 수와 당의 전략적인 유연성과 넘치는 에너지, 통일을 달성한 자신감과 동아시아 패권을 향한 집념에 밀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면 고구려가 민족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거나 필요성을 덜 인식했으며, 외교정책의 실패로 신라로부터 공격받고 백제나 왜의 도움을 못 받았던 탓일까?

어쨌든 고구려의 멸망으로 우리 민족은 대륙을 상실하고 해양 주도권을 일부 빼앗기면서 동아지중해의 중핵 조정 역할이 약해졌다.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 종족들은 훗날 우리를 압박한 강대국으로 변신했다. 한편 일본열도에는 탈출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일본국이 탄생(670년)했으며, 이들은 신라는 물론 한민족과 영원한 적대적 관계를 고수하게 된다. 지금 세계질서가 재편되고 중국 중심의 질서가 강요되는 현실 속에서 남북한의 적대감은 더욱 높아간다. 거기에 남남 갈등도 증폭되고 있다.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미래의 몫이며, 사건의 축적이 아니라 의미의 재생이 아닌가.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663년 8월 백제·왜 동맹군은 나당 연합군에 참패를 당했다. 백제 유민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당나라는 667년 9월부터 고립무원인 고구려를 총력을 기울여 공격했고 이듬해 평양성은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함락당했다. 당나라는 이용 가치가 떨어진 신라에 복속할 것을 압박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고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손잡고 676년 이민족을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우리 민족은 대륙을 상실하고 해양 주도권을 일부 빼앗기면서 동아지중해의 중핵 조정 역할이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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