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나 원광대 교수, 종중 사당·주암서원 회화 5점 조사
"보물 '최덕지 초상' 원본 아냐…더 이른 시기 그림 있어"
1975년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회화 '최덕지 초상' 중 15세기 원본이라고 알려진 작품이 후대에 베껴 그린 이모본(移模本)일 가능성이 크며, 이 그림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초상화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9일 학계에 따르면 유미나 원광대 교수는 한국미술사교육학회가 펴내는 학술지 '미술사학'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 '조선시대 최초의 사대부상, 최덕지 초상화의 전승과 현황'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보물 제594호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은 조선 전기 문인이자 학자인 최덕지(1384∼1455) 모습을 그린 초상화 원본과 초본(草本)으로 이뤄졌다고 알려졌다.

비단에 채색한 원본은 가로 53㎝·세로 74㎝이며,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초본도 크기가 거의 동일하다.

유 교수는 보물로 지정된 최덕지 초상과 관련된 문헌을 조사하고,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종중 영당(影堂·영정을 모신 사당)에 있는 그림 4점과 임실 주암서원에 존재하는 최덕지 초상 1점을 분석해 각각의 제작 시기를 유추했다.

유 교수는 "최덕지는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으로 내려가 수기치인을 실현하고자 했다"며 "순덕(順德)·고절(高節)의 선비가 된 최덕지의 초상화는 절을 올리는 대상으로 자리했고, 이모(移模·서화를 본떠 그림)를 거듭하며 전승됐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보물로 지정된 초상화에 대해 "원본은 아니지만, 조선 전기 초상화가 담아내고자 한 복합적 표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며 "고려 말 복제(服制)와 초상화 형태에 익숙했던 지방 화가 작품으로 여겨진다"고 평가했다.

보물로 지정된 초상화 중에는 후대에 원본을 보고 그린 모본이 적지 않은 편이다.

그는 각종 기록을 근거로 최덕지가 생존했을 때 영암에 지은 '존양루'에 사후 초상 원본이 봉안된 것으로 짐작되며, 임진왜란 때 존양루가 소실되기 전 후손들이 그림을 땅에 묻었다가 1610년 꺼내 모사본을 만들어 다른 곳에 모셨을 확률이 높다고 추정했다.

이어 종중 영당이 17세기 중반에 건립됐다고 덧붙였다.

이와는 별개로 영암 녹동서원에 18세기 초반 최덕지 영정이 봉안됐고, 이 그림이 1769년 한 차례 모사됐다고 유 교수는 설명했다.

최덕지가 관리로 부임했던 곳에 세워진 주암서원에도 18세기 후반에 최덕지 초상 이모본이 봉안됐다.

"보물 '최덕지 초상' 원본 아냐…더 이른 시기 그림 있어"
유 교수는 영암 종중 영당에 있는 최덕지 초상 4점 중 보물로 지정된 그림에 대해 "지금까지 15세기 작품으로 간주해 왔으나, 음영 표현과 합리적으로 개선된 세부 표현, 자연스러운 입체감의 구현, 눈 양 끝의 점막 등을 보면 18세기 작품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물로 지정된 초본도 18세기 작품으로 봤으며, 종중 영당에 있는 또 다른 초상은 20세기 중반에 그린 새 그림인 신본(新本)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제껏 궤 안에 있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최덕지 초상을 주목했다.

말린 채 보관된 이 그림은 손상이 심한 편이었다.

유 교수는 "보존 상태는 좋지 않지만, 덧칠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한 작품"이라며 "오른쪽 눈두덩과 콧등, 코 아랫부분에 연하게 음영 표현을 한 점은 17세기 초에 모사됐을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평했다.

그는 주암서원 최덕지 초상은 문헌을 바탕으로 1774년 작품으로 추정했다.

유 교수는 "최덕지 초상은 초상화 양식 연구가 부족했던 1970년대에 보물로 지정된 이래 면밀한 분석이 없었다"며 "이번 조사를 보면 15세기 원본 초상화는 없고, 현존 작품 중에는 궤에 있는 17세기 그림이 가장 오래된 듯하다"고 결론지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