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신화보다 그리스·로마 신화 더 친숙한 초등학생들
초등생 84% "입춘굿·영등신 축제 본 적 없다"

'신(神)들의 고향' 또는 '신들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제주.
[다시! 제주문화](7) "제우스·헤라 잘 알지만, 설문대할망·자청비는 몰라요"

제주에는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하는 토속신이 1만8천에 이를 정도로 많을 뿐만 아니라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神話)가 고스란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제주지역 초등학생들은 제주 문화와 정체성의 근본 줄기를 이루고 있는 제주 신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연합뉴스는 지난 3월 15∼31일 제주지역 초등학교 4∼6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제주 신화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삼성초등학교와 아라초등학교, 제주중앙초등학교, 서귀중앙초등학교, 토평초등학교 등 제주시와 서귀포시 지역 11개 초등학교 550명의 학생이 조사에 응답했다.

총 10개 문항으로 이뤄진 이번 조사에서 학생들 대부분이 모든 질문에 응답했지만, 문항에 따라 일부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경우도 있어 문항마다 응답자 수는 다소 차이가 나타났다.

[다시! 제주문화](7) "제우스·헤라 잘 알지만, 설문대할망·자청비는 몰라요"

설문조사 결과 초등학생들은 제주 신화보다도 그리스·로마 신화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설문대할망과 자청비, 삼승할망 등 제주의 신들보다 제우스와 헤라 등 그리스·로마 신화 속 등장인물에 더 친숙한 것으로 조사됐다.

우선, 제주 신화와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물었다.

제주 신화에 대해 '알고 있다'고 답한 초등학생은 341명(63%)으로, 그리스·로마 신화를 '알고 있다'고 답한 학생 374명(69.5%)보다 적었다.

초등학생 311명(57.7%)이 제주 신화 관련 책을 '읽어봤다'고 답했으며, 228명(42.3%)은 '읽어본 적 없다'고 답했다.

그리스·로마 신화 관련 책에 대해선 초등학생 332명(61.7%)이 읽어봤고, 206명(38.3%)이 읽지 않았다.

[다시! 제주문화](7) "제우스·헤라 잘 알지만, 설문대할망·자청비는 몰라요"

제주 신화와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한 초등학생의 인지도에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갈수록 차이는 크게 나타났다.

제주 신화에 등장하는 설문대할망·영등할망·삼승할망·자청비·백주또 등 10명의 신들과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헤라·아테나·헤파이스토스·헤르메스 등 10명의 신들에 대해 몇 명이나 알고 있는지 물었다.

예로 제시한 그리스·로마 신화 속 10명의 신들을 '모두 알고 있다'고 답한 학생은 150명(28%)에 달했지만, 제주 신화 속 10명의 신을 모두 아는 학생은 21명(3.9%)에 그쳤다.

또 과반이 넘는 350명(64.9%)이 제주 신화 속 등장인물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1∼2명 정도만 알고 있었다.

반면,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해선 초등학생 273명(50.9%)이 등장인물 중 6명 이상을 알고 있었다.

10명을 모두 알고 있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나머지는 0명에서 9명까지 비슷한 분포를 보였다.

[다시! 제주문화](7) "제우스·헤라 잘 알지만, 설문대할망·자청비는 몰라요"

제주 신화 상당수가 '굿'을 통해 구전되는 제주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상 초등학생들에게 '굿'을 본 적이 있는지도 함께 물었다.

결과는 응답한 학생의 85.4%인 458명이 굿을 '본 적 없다'고 답했고, 78명(14.6%)이 '있다'고 답했다.

또 제주 신화와 굿을 결합해 축제로 승화한 제주 입춘굿 축제, 영등신 축제를 본 적 있느냐는 질문에 451명(84%)이 '본 적 없다', 86명(16%)이 '있다'고 답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제주 신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느냐는 질문엔 342명(63.9%)이 '없다'고 답변했다.

초등학생들이 제주 신화를 접한 적은 있지만, 신화에 대한 이해도가 전반적으로 낮았다.

또 제주 신화를 일상생활과 축제 등을 통해 친숙하게 접할 기회가 매우 드물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다시! 제주문화](7) "제우스·헤라 잘 알지만, 설문대할망·자청비는 몰라요"

최근 들어 제주 신화를 비교적 알기 쉽게 다룬 서적과 앱북, 애니메이션 등이 보급되면서 초등학생들이 일부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다양한 제주 신화를 접할 기회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핵가족화로 할아버지·할머니, 손자·손녀의 조손(祖孫)간 거리도 멀어지면서 관련 이야기를 전해 들을 기회도 사라지고 있다.

강정효 전 제주 민예총 이사장은 지난 1999년 3월 제주시 건입동에 위치한 제주동초등학교 학생들이 마을 본향당에서 칠머리당영등굿을 지켜보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강 전 이사장은 "학생들이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접하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굳이 일부러 먼 곳을 갈 필요도 없이 제주 각 마을의 본향당에서 이뤄지는 영등굿과 해신제와 같은 마을제를 때마다 학생들이 현장학습을 통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 자체가 자신을 비롯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속한 마을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제주문화](7) "제우스·헤라 잘 알지만, 설문대할망·자청비는 몰라요"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한 뒤 제주 신화 저술 활동을 하는 김정숙(필명 여연) 작가는 "신화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다루고 있어 어린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모순들에 관해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며 "어린이들은 신화를 통해 자연을 살아있는 인격체로 이해하고 자연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력을 기르게 된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제주 신화 속에는 제주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정신문화가 담겨 있다.

어린이들이 제주 신화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제주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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