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연루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전·현직 고위법관들에게 첫 유죄 판결이 나왔다. 그동안 비슷한 재판에선 법관들에게 다른 재판에 관여할 ‘직권’ 자체가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가 적용돼 무죄 선고가 잇따랐지만 이번엔 달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윤종섭)는 23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방창현 전 전주지법 부장판사, 심상철 전 서울고법원장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전 실장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이 전 상임위원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과의 공모도 일부 인정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놨다.

이 전 실장은 옛 통합진보당(통진당) 의원들의 지위 확인 소송에 개입하고, 국제인권법연구회 등을 와해시키려 한 혐의를 받는다. 이 전 상임위원은 헌법재판소 내부 기밀을 불법 수집하고, 옛 통진당 관련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다.

심 전 원장은 옛 통진당 의원들의 행정소송 항소심을 특정 재판부에 배당하도록 지시한 혐의, 방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의 요청을 받고 자신이 담당하던 옛 통진당 의원들 사건의 선고 결과와 판결 이유를 누설한 혐의를 받았다.

재판부는 판사의 사건 심리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등에 따라 직권남용죄 적용 여부를 달리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특정 사건을 담당하는 판사가 핵심 영역에 속하는 부분에 대해 아무런 판단을 안 내렸을 때 법원행정처가 먼저 연락해 지적·권고하는 경우는 사법행정권 보호법익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며 “그러나 판사가 핵심 영역에 속하는 부분에 대해 결정을 내렸는데 이를 취소하라거나 다시 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직권남용죄의 요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어 “재판 사무를 담당하는 판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시 받는 데 익숙해져선 안 된다”며 “법원행정처의 통진당 소송 개입은 재판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이 전 위원이 헌법재판소 내부 정보를 수집한 혐의에 대해서도 직권남용죄를 인정했다. 이 전 실장은 판결 직후 기자들에게 “아직 재판 중이어서 얘기를 못한다”며 말을 아꼈다. 항소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