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속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 해결 모델 제시

73년 전 해방정국 혼란기 속 제주에서는 국가 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다.

바로 제주4·3이다.

제주4·3 역사적 자리매김 완료…'화해와 상생'으로 간다
4·3의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제주시 관덕정 북쪽에 있는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였다.

이날 가두시위 과정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차이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경찰이 그대로 지나쳐 가려고 하자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경계를 서던 경찰이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6명이 숨지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도민은 이 사건에 항의해 같은 달 10일 민관 총파업으로 경찰에 맞섰다.

이때 미군정은 파업 참여자 등을 잡아 가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무장대 350여명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응원 경찰 및 서북청년단 추방' 등을 외치며 도내 경찰지서 12곳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습격했다.

토벌대는 무장대를 강경 진압했다.

그리고 그해 5월 10일 남한 단독으로 실시된 선거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가 기준 투표율에 미달해 무효 처리가 된 뒤로 군과 경찰은 진압에 더욱 고삐를 쥐었다.

같은 해 11월 17일에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1949년 1월 17일에는 군경토벌대가 조천면 북촌리 주민 400명가량을 집단 총살하고 마을을 모두 불태운 '북촌 사건'이 일어났다.

마을 인근에서 군인이 기습받은 데 대한 보복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제주4·3 역사적 자리매김 완료…'화해와 상생'으로 간다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마을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한국전쟁 발발 뒤로는 보도연맹 가입자나 입산자 가족 등을 잡아들인 뒤 집단 수장하거나 총살, 암매장하는 일이 잇따랐다.

1947년 3·1 발포사건 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출입 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4·3으로 희생된 인명 피해는 적게는 1만4천명에서 많게는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국가 권력은 수십 년간 제주도민에게 4·3에 대한 침묵을 강요했고, 진실을 왜곡·은폐했다.

금기시되던 4·3을 세상에 알린 건 1978년 발표된 제주 출신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 삼촌'이다.

북촌리 집단학살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4·3의 참혹한 진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드러냈다.

1989년에는 도내 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사월제 공동준비위원회'가 첫 대중적 추모행사를 열었다.

제주도의회도 1993년 4·3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킨 후 피해 신고를 받아 1995년 5월 첫 보고서를 발간했다.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다.

4·3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운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2년에는 1천715명이 정부로부터 처음 4·3 희생자로 인정됐다.

제주4·3 역사적 자리매김 완료…'화해와 상생'으로 간다
2003년 10월 15일 4·3진상보고서가 확정되자 보름여 뒤인 3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 "과거 국가 권력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사과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위령제에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해 직접 도민을 위로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수십 년 동안 서로 등 돌리고 살아온 4·3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가 "우리는 모두 피해자다.

서로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겠다"며 손을 맞잡았다.

이듬해인 2014년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66주년 추념식이 처음으로 국가 의례로 봉행 됐다.

70주년을 맞은 2018년에는 정부가 제기한 형평성 논란에도 도의회의 의결로 4·3희생자 추념일이 전국 최초로 지방 공휴일로 지정됐다.

사법부에서도 진상규명의 물꼬가 트였다.

2019년 제주4·3 생존 수형인 18명이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타지로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을 법적으로 인정받고 4·3 당시 범죄기록이 모두 삭제됐다.

이들 18명은 4·3 수형 희생자 불법 군사재판 재심청구 소송 선고에서 사실상 무죄인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제주4·3 역사적 자리매김 완료…'화해와 상생'으로 간다
여기에 지난 20대 국회 때인 2017년 12월 처음 발의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우여곡절 끝에 26일 국회를 통과했다.

제주4·3특별법 개정에 따라 수형인에 대한 명예 회복에 관한 조항, 배·보상과 관련한 '위자료 등의 특별지원', 추가 진상조사 방안 등이 추진된다.

이번 제주4·3특별법 전부 개정으로 4·3의 역사적 자리매김이 완료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와 재일본제주4·3유족회, 미주제주4·3유족회준비위원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지난달 46대 미국 대통령 취임에 맞춰 바이든 정부에 공개 서한문을 보내 4·3에 대한 미국 책임을 인정하고 공동 조사를 요구했다.

아울러 제주도 등이 4·3과 4·3 기록물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4·3소설 '순이삼춘'을 오페라로 제작해 선보이는 등 4·3의 세계화를 위한 운동도 진행 중이다.

한편 제노사이드(집단학살) 해결 모델로써 제주4·3의 '화해와 상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4·3 화해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간 갈등이 심했지만 2013년 4·3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 선언을 했다"며 "당시 화해를 선언한 8월 2일마다 유족과 경찰이 4·3평화공원과 충혼묘지를 방문해 합동 참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 이사장은 "또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에 추모 공간을 마련해 4·3 피해자와 군경희생자 신위를 함께 안치해 참배하는 등 이념 갈등을 뛰어넘어 4·3이 화해와 상생의 길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dragon.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