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명성황후' 25년 함께한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 인터뷰
34년간 무대 제작…"제한된 세트로 다양한 장면 구현할 수 있어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초연부터 25주년 기념공연까지 모든 순간을 함께해 온 이가 있다.

바로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다.

"무대 디자인은 '장소의 재현'이 아닌 작품의 컨셉을 잡는 일"
국내 첫 대극장 창작 뮤직컬이기도 한 '명성황후' 무대의 산파 역할을 한 그는 국내 초연 이후 미국, 영국 등 해외에서 이뤄진 공연은 물론 대대적인 변화를 꾀한 이번 시즌까지 모든 무대를 책임졌다.

'명성황후'뿐만이 아니다.

'영웅', '신과 함께: 저승편', '그날들' 등 국내서 손꼽히는 창작 뮤지컬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올해로 무대 디자인을 시작한 지 34년째인 박 디자이너가 참여한 작품은 400편이 훌쩍 넘는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박 디자이너는 한 분야에서 오랜 기간 일한 전문가의 내공에서 비롯된 자신감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작품별 무대 특징을 설명할 때는 창작자의 열정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그에게 '명성황후'는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특히 경사진 원형의 이중 회전무대는 초연 때만 해도 어느 공연에서도 선보인 적 없었던 디자인으로 공연계 내에서 '마스터피스'로 꼽힌다.

25년간 무대는 크게 두 번 바뀌었다.

초연 이후 1997년 뉴욕 공연을 가면서와 이번 25주년 기념공연에서다.

"무대 디자인은 '장소의 재현'이 아닌 작품의 컨셉을 잡는 일"
박 디자이너는 "뉴욕 공연에 가면서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가져갔다.

극장 크기가 달랐기 때문에 원래 15m이던 회전무대 직경을 12m로 줄여야 했고, 무대에 쑥 들어오던 거대한 뱃머리도 돛대만 출렁이는 지금의 방식으로 바꿨다.

덩치 큰 세트를 콤팩트하게 바꾼 것이 첫 변화였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규모를 줄인 무대장치는 세세한 소품까지 포함해 모두 컨테이너 2대에 쏙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회전무대는 하마터면 해외에서 선보이지 못할 뻔했다.

제작뿐만 아니라 이를 현지 극장에 설치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문제였다.

박 디자이너는 "해결책이 안 나오면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당시에는 장치를 움직이려면 보통 구조물에 바퀴를 달았는데, 역발상으로 무대에 바퀴를 달아 구조물을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무게가 가벼워지고, 조립 시간도 짧아졌다.

뉴욕에서는 이를 본 현지 스텝이 특허를 내라고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무대 디자인은 '장소의 재현'이 아닌 작품의 컨셉을 잡는 일"
최근 무대에서 움직이는 많은 장치가 박 디자이너가 고안한 아이디어를 차용하고 있다.

이동에 용이할 뿐 아니라 장치들이 움직일 때마다 밑에 깔린 각종 케이블이 바퀴에 짓눌려 끊기는 무대 사고를 줄이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박 디자이너는 "특허를 냈어야 하는데, 못 냈다"고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박 디자이너가 회전무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상징하는 바와 기능이 크기 때문이다.

이 회전무대는 엇갈려 돌아가는데, 이는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정세의 소용돌이를 표현해준다.

또 경사가 져 있어 왕과 신하가 서 있을 때 높낮이를 만들어내고, 칼에 찔려 쓰러진 궁녀들이 무대에서 걸어 나가거나 암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기능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대는 지난 시즌까지 이어지다 이번 시즌에 파격적인 변화를 맞았다.

회전무대를 빼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LED가 도입되면서 제한된 세트로 다양한 장면 연출이 가능해졌다.

박 디자이너는 "사실 LED를 쓰기로 하고, 지나치게 설명적인 세트가 될까 봐 우려했는데 다행히 영상 디자이너가 좋은 장면들을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무대 디자인은 '장소의 재현'이 아닌 작품의 컨셉을 잡는 일"
박 디자이너는 무대가 단순히 장소의 재현에 머무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그는 무대를 만들기 전에 항상 '우리는 이 공연을 지금, 여기서, 왜 하는가'를 자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그는 "작품의 개념, 즉 컨셉을 도출하는 일이 무대 디자인의 절반"이라며 "전통적인 무대 개념은 장소를 재현하는 데 중점을 뒀지만, 무대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극의 분위기나 정서, 역동성 등을 담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개인적으로 한 가지 구조물이 여러 역할을 하는 걸 좋아한다"며 "장면마다 새로운 걸 보여주는 건 쉽다.

이건 물량 싸움이다.

진짜 좋은 무대는 많지 않은 세트를 어떻게 배합해서 장면들을 만들어내느냐다"라고 덧붙였다.

실제 그가 만든 무대를 보면 '명성황후' 초연 때는 경복궁을 건축적으로 재현한 무대장치 하나 없이, 바닥에 깔려있던 모형들을 공중으로 끌어올려 공간적 설명을 마쳤다.

'신과 함께'에서는 윤회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원형의 바퀴를 무대 모티브로 만들었고, '영웅'에서는 기차 모형과 영상을 혼합시켜 역사의 한 장면을 구현해냈다.

박 디자이너는 "요즘은 30여년 전과 비교해 무대 기술이 좋아졌다.

예전에는 밖에서 무대 배경의 그림을 그리다 비가 오면 그림이 흘러내리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디자이너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기술진이 채워주는 상황"이라며 "LED, 3D 영상 등 새로운 기술은 계속 나오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의 본질에 맞는 무대 디자인을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 디자인은 '장소의 재현'이 아닌 작품의 컨셉을 잡는 일"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