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옥·고문 속에서도 한평생 통일·민주화운동에 헌신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우리말 사랑한 시대의 이야기꾼
백발 휘날리며 전국 누빈 통일·민중운동가 백기완 선생

15일 영면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1932∼2021)은 독재 정권과 싸운 `투사'이자 한국 민주·민족·민중운동의 `큰 어른'이었다.

백 소장은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일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부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는 백범 김구 선생과도 인연이 깊다.

그의 조부가 피신하던 백범을 돌보았고, 이후 백 소장은 백범의 영향을 받았고 스승처럼 따랐다.

남북 분단으로 어머니와 헤어지고 전쟁통에 형을 잃는 과정에서 축구선수를 꿈꾸던 소년은 사회 부조리에 눈을 떴다.

투옥과 모진 고문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다.

그는 1950년대 농민·빈민운동을 시작했고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다.

1974년 유신 반대운동으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고, 1979년 `명동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각각 주도해 투옥됐다.

이 가운데 긴급조치 위반과 YMCA 사건은 훗날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전태일의 분신과 경기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구체화한 민중의 생존권 투쟁 속에서 그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과 통일문제연구소,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민주노총의 전신), 민족문화대학설립위원회 등 재야 민주화·통일·노동운동 전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민중운동 진영은 그를 2차례에 걸쳐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했다.

군사정권 종식이란 국민적 염원 속에 치러졌던 1987년 대선에는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후보직을 내려놨으나, 1992년 대선에선 독자 민중후보로서 일명 `백선본'과 함께 완주했다.

백발 휘날리며 전국 누빈 통일·민중운동가 백기완 선생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투쟁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한복 차림을 한 백발의 투사는 노령이 된 최근까지도 전국의 투쟁 현장과 연단에 올라 목소리를 높였다.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2013년 울산 현대자동차와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현장, 2014년 충북 옥천 유성기업 등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빠지지 않고 올라탔고 자본과 공권력을 꾸짖었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2015년 민중총궐기 현장에서도 온몸으로 싸웠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복직 등을 요구하며 노동계가 집결한 지난해 말에는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사회 원로들과 함께 대통령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백 선생은 순우리말을 벼린 문필가이자 이야기꾼이었다.

`민중'은 `니나'로, `사상'은 `든메'로, `꿈'은 '바랄'로 고쳐 쓰는 등 일상 대화에서도 순우리말을 썼다고 한다.

그의 순우리말 사랑은 소설 `다끔한 한 모금'(2007), `버선발 이야기'(2019)에 고스란히 담겼다.

시 `묏빗나리'(1980)는 집회 현장에 빠지지 않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이 됐다.

`항일민족론'(1971),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9),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두 어른'(2017) 등 평론·수필집을 써내는 등 저술 활동도 왕성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의 요청으로 대표팀 선수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 거스 히딩크 전 감독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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