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출근하는 김명수 대법원장. 사진=뉴스1
지난 9일 출근하는 김명수 대법원장. 사진=뉴스1
'대법원장', '거짓말' 그리고 '정치'.
모여서는 안 될 단어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느라 후배 법관의 사표를 받지 않았다는 의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처음 관련 언론 보도가 나왔을 땐 해당 의혹을 적극 부인했지만 녹취록이 나오면서 그 해명은 거짓말로 드러났습니다. 그는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해 답변했다며 사과했습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맞다. 송구하다'는 해명 이후 현재까지 일주일가량 침묵 중입니다.

지금의 사태는 좌우 혹은 진보·보수 진영 논리로 볼 문제가 아닙니다. 2018년 반헌법적인 행위를 한 법관에 대해 법원이 보여준 엉거주춤한 대응, 2020년 임 부장에 대한 탄핵은 옳지 않다면서도 국회의 탄핵 추진 등을 이유로 사표 수리를 반려한 대법원장, 그리고 2021년 대법원장이 거짓 해명을 했다는 데 충격을 받은 후배 법관들과 국민들의 실망이 한 데 얽혀있습니다.

이념논쟁을 떠나 무너진 사법부의 신뢰를 앞으로 어떻게 회복해 나갈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3부 요인이자 사법부 수장인 김명수 대법원장의 침묵은 옳지 않아 보입니다.

1. 사법부 신뢰 '흔들' 책임져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놓여있는 근조화환. 사진=뉴스1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놓여있는 근조화환. 사진=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이 침묵을 깨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김 대법원장이 사법부 신뢰 훼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지난 4일 공개된 김명수 대법원장과 임성근 부장판사 사이의 녹취록은 법조계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나로서는 여러 영향이랄까 뭐 그걸 생각해야 하잖아. 그 중에는 정치적인 상황도 살펴야 되고.
더 툭 까놓고 얘기하면 지금 뭐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했다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 말이야
혹자는 김 대법원장의 말마따나 원래 친분이 있던 두 사람이 '툭 까놓고' 나눈 대화인데 왜 이렇게까지 문제삼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사법행정 최고 책임자와 일선 법관 사이의 대화이며, 그 대화를 나눈 곳은 사적인 장소가 아니라 대법원장과의 공식 면담자리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김 대법원장은 "내가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 말이야"라고 말하며 사법부의 수장이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고 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A4 종이에 불과한 판결문을 믿고 그 종이에 적힌 처분에 따르는 것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정치적 셈법이나 '여러 영향'과 상관없이 오직 법률과 법관의 독립된 양심에 따라 법원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에 국민들은 법정으로 재판을 받으러 가고 판사들을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부릅니다.

누구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신경쓰게 되고 이쪽저쪽 눈치를 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법부만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법관들에게 사건을 맡기는 겁니다.

그런 사법부의 수장이 '정치적인 상황'도 살피고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느냐'며 바짝 신경쓰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번 사태로 사법부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기억이 안 났다'는 말 외의 설명을 할 책임이 있습니다.

2. 임성근 부장 '견책' 설명해야

김명수 대법원장이 침묵을 깨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앞뒤가 맞지 않은 그의 행동 때문입니다.

2018년 10월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농단' 연루 의혹을 받는 임성근 부장판사에게 '견책'이라는 징계를 내렸습니다. 견책은 법관징계법이 규정하는 징계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징계입니다.
법관징계법 제3조(징계처분의 종류) ① 법관에 대한 징계처분은 정직·감봉·견책의 세 종류로 한다. ② 정직은 1개월 이상 1년 이하의 기간 동안 직무집행을 정지하고, 그 기간 동안 보수를 지급하지 아니한다. ③ 감봉은 1개월 이상 1년 이하의 기간 동안 보수의 3분의 1 이하를 줄인다. ④ 견책은 징계 사유에 관하여 서면으로 훈계한다.
같은 해 11월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임성근 부장판사의 행위는 중대한 헌법위반 행위로서 탄핵소추 대상"이라고 의결까지 했지만, 그 이후 추가조치는 없었습니다. 즉,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미 임 부장판사의 행위가 '서면으로 훈계할 정도'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2020년 5월 임 부장판사가 낸 사표를 반려하는 자리에서 김 대법원장은 돌연 탄핵 얘기를 다시 꺼냈습니다. 녹취록에 따르면 김 대법원장은 임성근 부장판사의 재판개입 행위가 탄핵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그냥 (사표를) 수리해버리면 탄핵 얘기를 못 하잖아" 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3년 전 본인이 내린 견책 처분이 잘못됐다는 건지, 아니면 당시 견책 처분은 적절했고 임 부장판사의 행위는 탄핵감은 아니라는 건지, 탄핵감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국회의 탄핵 추진 얘기는 왜 꺼낸건지…. 김 대법원장은 명확히 설명할 의무가 있습니다.

3. 사법부 최고 어른으로서의 역할

김명수 대법원장이 침묵을 깨야 하는 마지막 이유는 후배 법관들에 대한 예의 때문입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실망감을 느끼는 일선 법관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김 대법원장의 사퇴 문제를 놓고서는 법조인들 간 여론이 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이 거짓 해명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믿고 싶지 않았다' '실망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판사들은 그 직업 자체가 거짓말과 싸우는 직업입니다. '오늘은 어떤 쪽이 거짓말을 하나, 무엇이 실체적 진실일까, 잘 가려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재판에 임합니다. 증인신문을 할 때도 증인이 혹시 위증을 하는 것은 아닌지, 답변을 할 때 눈빛은 어떻고 몸가짐은 어떤지조차 놓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대법원장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것도 사법부의 명예가 걸린 중대한 사안에서 말입니다.

그의 침묵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사법부의 최고 어른으로 후배 법관들에게 불어오는 외풍을 막아주길 기대했을 때에도 그는 침묵했습니다. 각종 판결들로 법관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 정치권에서 난무할 때, 탄핵 얘기가 오갈 때도 그는 침묵했습니다.

지방법원의 한 7년차 판사는 "탄핵은 국회의원들이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중한다. 하지만 사법부 수장으로서 판사들이 위축되지 않게끔 역할을 하겠다. 기존에 하던 재판은 흔들리지 말고 소신대로 하라"는 정도는 기대했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사건기록을 들여다보며 충실히 재판에 집중하고 있을 후배 법관들에게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추가적인 입장을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

'회피'라고 읽히는 침묵은 절대 금(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장이라는 자리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김 대법원장이 끝까지 자리를 지킬 생각이라면 더욱 말입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