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열린 과로로 사망한 고(故) 김원종 유가족 CJ대한통운 면담 요구 방문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버지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스1
14일 오후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열린 과로로 사망한 고(故) 김원종 유가족 CJ대한통운 면담 요구 방문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아버지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스1
"아들이 나가면서 어제보다 더 늦는다고 말했다.
오후 병원에 가보니 아들에게 심정지가 왔고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난 8일 서울 강북구에서 택배 배송 업무 중 호흡 곤란을 호소하다 숨진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 김원종(48)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례식장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아들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뛰어만 다녔다. 사고로 죽는 게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내 새끼도 그렇게 숨을 거뒀다"며 흐느꼈다.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는 올해 들어서만 8명째다. 더 큰 문제는 상황이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데 제도도, 법도, 택배업체 행태도 변한 게 없다.

17일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살인적 스케줄에 인력을 충원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부까지 나서 주문한 추석 연휴 인력 충원 지원조차 "택도 없는 소리"였다고 털어놨다. 현장에선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서'까지 쓰도록 하는 게 현실이었다.

현장 택배노동자들은 잘못된 근로 환경에 대한 근본적 대책 없이는 과로사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 지적했다.

"금액 부담할 테니 인력 충원" 호소에도…택배업체 '모르쇠' 일관

택배노조 측은 이미 올해 초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으로 택배 물량이 급증하자 노동자들의 업무 부담이 극에 달했다며 '분류 작업'에 대한 인력 충원을 요구해왔다.

분류 작업은 택배기사의 노동 강도를 높이는 대표적인 업무로, 전체 근무시간 중 43%를 차지한다. 분류 작업에만 하루 평균 8~9시간이 할애된다. 이후 배송 업무까지 완료해야 하다 보니 택배기사의 일일 평균 노동 시간은 13시간을 훌쩍 넘는다.

고인 김씨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김씨는 하루 400건 이상의 물량을 배송하기 위해 평균 15시간 동안 근무를 이어갔다.

김세규 전국택배연대노조 교육선전국장은 "분류 작업 노동에 대해 회사 측에서 50%만 부담하면 택배기사와 대리점이 나머지를 내겠다는 제안도 끊임없이 했다"라면서 "그러나 사측은 이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택배업체가 인력 충원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데에는 분류 작업을 무임금 노동으로 책정한 탓이 크다. 현장 노동자들은 택배를 배송하는 일과 그 전에 분류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상식적인 선에서도 하루 8시간이 넘는 노동이 무일푼이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택배업체들은 택배기사들이 받는 배송 수수료에 분류 작업 비용도 포함돼 있다며 추가 비용과 인력을 제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법체계상 택배기사는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월급이 아닌 건당 수수료를 받는데, 이를 역이용해 분류 작업 전체를 택배기사에게 '공짜로'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택배기사가 고용노동부와 법적 체계가 보호해줄 수 없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직)이란 점도 사측이 책임을 회피하는 요인이다.

김세규 국장은 "근로 행태 개선을 지속 요구하고 있으나 특고직은 이에 대한 법적 근거나 제도적 기준이 전혀 없다"며 "가치가 산출되지 않는 노동이 굉장히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준은 없고 갑을관계는 세다 보니 강제적인 부분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임금 노동은 김씨의 사고 당일에도 이어졌다. 9시간 넘게 일한 김씨의 당일 임금은 3만5천원가량.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물량 분류 작업을 했으나, 이후 1시간반 동안 진행했던 배송 업무의 수수료만 임금으로 지급되는 탓이다.
서울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택배기사들이 분류 작업을 마친 뒤 배송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택배기사들이 분류 작업을 마친 뒤 배송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추석 인력 충원 '꼼수'…산재 적용제외신청서 작성 강요까지

절대적 '을'이었던 김씨의 상황은 추석 연휴에도 계속됐다. 앞서 정부와 배송업계는 추석 성수기만이라도 분류 인력을 충원하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보여주기식에 불과했다. 김씨가 근무했던 택배 대리점에 추석 성수기 인력 충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김세규 국장은 "정부와 업체 측이 2000여명의 인력 지원을 약속했지만, 택배기사의 분류 작업을 돕기 위한 인력 투입은 300여명에 그쳤다"며 "그마저도 노동조합 내 가입된 조합원이 있는 터미널에만 인력이 투입됐다. 조합원 없는 터미널에는 지원 인력이 0명이었던 꼼수"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 확인 결과, 이번 추석 연휴 서브터미널 분류 작업에 당초 계획보다 많은 3258명의 인력이 투입됐으나 대부분 택배기사의 업무와는 무관한 상하차 인력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노조 측은 택배기사가 직접 투입되는 분류 작업만을 언급하는 것이고 사측에서는 터미널 전체에 투입된 분류 인력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기준의 차이"라고 답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김씨가 산재보험 적용 대상도 아니라는 것. 사고 한 달 전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서를 제출한 탓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김씨의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 경위에도 강압적인 요구가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김세규 국장은 "산재 적용 제외 신청서 현장 자료를 살펴보면 같은 날 동시에 30~40명이 쓰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김씨 지점의 경우도 12명 근로자 중 같은 날 9명이 신청서를 썼다. 대리점 소장이 택배기사들에게 강제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서 중 일부 필체가 상당 부분 유사한 것으로 파악되면서 대필 의혹까지 나온 상태다.

현재 산재보험 적용을 받는 택배기사의 수는 극히 적다. 우선 사용자와 택배기사 간 고용 관계 신고를 해야 산재가 의무적용되는데, 전국의 택배기사 5만여명 가운데 1만8000여명만이 이에 부합한다. 이 중에서도 7000여명의 택배기사만이 산재를 적용받는다. 1만1000여명이 이미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택배노조 측은 현장에서 노동자가 사측의 요구를 거부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부연한다. 김세규 국장은 "언제든 계약 해지를 당할 수 있는 택배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할 방법이 없다"며 "재해 신청서를 악용하는 사례"라고 비판했다.

고용노동부는 당장 택배기사를 보호할 법체계가 없기 때문에 우선 산업재해보상법을 통한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입장. 노동부는 지난 6일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 사유를 종사자의 질병, 육아 또는 사업주의 귀책 사유로 인한 휴업 등으로 제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산업재해보상법 관련 사안에 대한 추진 일정과 계획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연내 처리하자는 얘기가 나오는 중"이라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생활물류산업발전법·일명택배법까지 통과되면 추가 지원 방안도 마련할 것"이라고 답했다.

CJ대한통운 측은 택배기사 과로사 관련 질문에 "해당 사안은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기에 말씀드리기가 어렵다"며 "유가족께 깊은 위로 말씀드리며 필요한 부분에 최대한 협력할 것"이라고만 답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