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사과 요구에는 침묵…퇴임식 생략·퇴임사도 안남겨
권순일 대법관 오늘 퇴임…'성인지 감수성' 판결 기준 세워
권순일 대법관이 6년의 임기를 마무리하고 8일 퇴임했다.

그는 성범죄를 피해자 관점에서 이해하는 '성인지 감수성'의 기준을 세우고 출생등록권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등 선례적 의미가 큰 판결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책임론을 두고 비판이 이어지고 있어 빛이 바랬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조계에 따르면 권 대법관은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정통 엘리트 법관 출신 대법관이라는 점에서 흔히 보수·중도 성향으로 분류됐다.

권 대법관은 그의 후임인 이흥구 대법관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한 주심 판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법관에 임명된 뒤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에 무게를 둔 기념비적인 판결을 잇달아 내놔 눈길을 끌었다.

그는 2018년 4월 성희롱을 한 대학교수의 해임을 취소한 2심 판결에 대해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했다고 지적하면서 심리를 다시 하라고 파기 환송했다.
권순일 대법관 오늘 퇴임…'성인지 감수성' 판결 기준 세워
이는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의 처지와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으로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첫 판결로 받아들여졌다.

올해 3월에는 술에 취해 잠든 여자친구의 나체를 촬영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여자가 명확한 촬영 거부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동의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지난 6월에는 출생 서류가 일부 미비해도 아동이 태어난 즉시 출생을 등록할 수 있는 권리를 기본권으로 처음 인정한 판결을 내놓기도 했다.

권 대법관은 이재명 경기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현대·기아차 산재 유족 채용 단체협약 사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처분 사건 등에서도 표현의 자유, 노조의 기본권 등을 강조하며 다수의견에 동조했다.

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으로서 그의 이런 판결이 예상과 다르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소수자 인권에 대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권 대법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퇴임식 없이 이날 대법관 임기를 마무리했다.

별도의 퇴임사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임기 만료 때까지 선거관리위원장 직에 대한 퇴임 여부를 밝히지 않으면서 '자리보전을 위한 것 아니냐'는 정치 공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권순일 대법관 오늘 퇴임…'성인지 감수성' 판결 기준 세워
선관위원장 임기는 6년으로 법적 임기는 2023년까지다.

그러나 역대 선관위원장들은 대법관 임기를 마치면서 선관위원장 직도 함께 내려놓는 것이 관례였다.

권 대법관은 "곧 선관위 사무총장과 사무차장 후임 인사가 곧 있으니 그것까지만 마무리 짓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임기 만료 때까지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아 사실상 책임을 회피했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 따르면 권 대법관은 법원행정처 차장이던 2013년과 2014년 이른바 '법관 블랙리스트'로 알려진 '물의 야기 법관 인사 조처 검토' 문건 작성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전날 "권순일 대법관의 퇴임이 사법농단 사태의 완결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권 대법관의 무사한 퇴임으로 우리 사법 오욕의 역사도 또 한 줄 남겨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