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남편 잃고 독립투쟁 투신·만주독립운동가 대모…남자현 지사
간호사로 만세운동 앞장·일가족 모두 독립운동가…노순경 지사
학병 탈출 뒤 항일전투 참전·한중합동유격대 선봉에…성동준 지사

일제에 대항해 치열하게 전개된 독립운동에는 만주 무장독립운동가 대모,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일본에 강제동원된 학병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함께했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저마다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목숨을 걸었던 이들의 헌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

광복 75년을 앞둔 13일 이들 세 명의 애국지사 활약상을 살펴본다.

◇ 61세에 일본 대사 처단에 나선 남자현 지사
[광복 75년] ③ "열사의 혼은 계속된다"…광복 밑거름된 3인의 희생
만주 무장독립운동단체 서로군정서 최초 여성 대원으로 활약한 남자현(1872-1933) 애국지사는 만주 독립운동가들에게 '대모'로 불렸다.

남 지사는 항일 의병이던 남편을 잃고 1919년 2월 아들과 함께 고향인 경북 영양을 떠나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독립군 대원들 옷을 만들고 먹을 것을 준비하는 등 뒷바라지를 하며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1925년 4월 서울에 몰래 들어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 거사를 추진했으나 안타깝게 실패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조국 독립을 위해 세 손가락을 버린 남 지사. 1932년 9월 국제사회에 알릴 혈서를 세 번째로 쓰던 때 그의 왼손에는 엄지와 검지, 약지가 없는 채로 손가락 2개만이 남아 있었다.

1933년 3월 1일 61세 나이에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일본의 만주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암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가혹한 옥고를 치렀고 병보석으로 출옥했지만, 그해 8월 22일 끝내 순국하게 된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남 지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또 그의 공적을 기려 1999년 영양군 석보면에 남 지사 생가를 복원하고 2003년 현충 시설로 지정했다.

◇ 신생아실에 태극기 숨겨 만세운동 펼친 노순경 지사
[광복 75년] ③ "열사의 혼은 계속된다"…광복 밑거름된 3인의 희생
간호사 출신 노순경(1902-1979) 지사는 1919년 12월 2일 서울(당시 경성부) 훈정동 대묘 앞에서 시위대 20여 명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조선총독부 폭압에 맞서 힘차게 흔들었던 태극기는 그가 병원 신생아실 포대기에 꽁꽁 싸서 숨겨 놓았던 것이다.

노 지사는 이도신, 박덕혜, 김효순 등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소속 동료 3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해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고,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 여자 8호 감방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의 아버지는 1900년대 초반 도산 안창호 선생 등과 신민회를 만들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노백린 장군이다.

오빠(노선경), 동생(노태준), 남편(박정식) 등 가족 대부분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노 지사는 결혼한 뒤 중국 하얼빈 고려병원에서 의사인 남편, 형부와 함께 다친 독립군을 치료하고 군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맡았다.

1924년 고국으로 돌아와 인천, 제천, 서울 등지에서 남편과 병원을 운영한 그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대한부인회 부회장으로 북한군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농촌 지역에서 무료 의료봉사를 하고 3·1여성동지회 활동을 하다가 1979년 별세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 학병 탈출해 유격대 선봉에 선 성동준 지사
[광복 75년] ③ "열사의 혼은 계속된다"…광복 밑거름된 3인의 희생
전 전남교육감인 성동준(1912-1980) 지사는 일본에서 학병으로 강제동원됐다가 탈출해 항일 전투에 참전했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성 지사는 1944년 1월 일본 규슈(九州) 제국대 법과를 졸업한 뒤 학병으로 징집돼 중국 쑤저우(蘇州) 주재 일본군 60사단에 배치됐다.

그는 간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으며 동지들을 포섭했다.

1944년 6월 김영남 등과 함께 무기와 군 문서를 휴대하고 최전선 시찰에 나선 것처럼 가장해 탈출에 성공한다.

1945년 3월 한중합동유격대를 인솔해 일본군 부대를 쳐부수고 친일 중국보안대를 습격하는 등 전과를 올리며 부대원을 700명까지 늘렸다.

이후 충의구국군 사령부에 도착해 미국 고문관에게 일본군 관련 정보와 문서를 제공하는 등 공을 세웠다.

그 뒤로도 일본군과의 교전, 유격전 등에 계속 참전하며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광복을 맞아 상하이로 이동해 귀환 교포들의 입국을 돕던 그는 광복군의 일원으로 편입돼 그리던 고국 땅을 밟는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1946년 영암군수를 지냈으며 1965년 문교부 차관으로 발탁됐고 제3대 전남교육감을 지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손현규 장아름 한무선 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