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 범람한 생창리, 어른 허리 높이까지 침수…농경지도 잠겨
무너진 옹벽에 깔려 형체 사라진 차량…군부대 담장도 붕괴
[르포] "무너지고 잠기고 터지고" 시간당 84㎜ 수마가 할퀸 철원
한반도의 허리를 두르던 비구름 떼가 3일 새벽 강원 내륙지방에 장대비를 쏟아냈다.

철원은 밤새 200㎜가 넘는 물 폭탄을 맞았다.

한때 시간당 84㎜까지 강한 빗줄기가 때렸다.

동이 트자 피해는 곳곳에 드러났다.

접경지 마을은 통째로 물에 잠겼고 수확을 앞둔 농작물도 침수 피해를 봤다.

도로 곳곳은 토사가 덮쳤다.

심지어 굳게 서 있어야 할 군부대 담장도 힘없이 무너졌다.

펜션에서 단잠을 자던 관광객들은 숙소까지 들어차는 빗물에 황급히 대피했다.

[르포] "무너지고 잠기고 터지고" 시간당 84㎜ 수마가 할퀸 철원
"자고 있는데 갑자기 앞집 젊은이가 물난리가 났다며 깨우더라고. 급히 일어나니 문턱까지 물이 들어찼어. 급하게 집을 빠져나왔는데 마을이 물에 다 잠겨있었지."
철원 김화읍의 작은 접경 마을인 생창리 노인정에서 만난 조민구(77)씨는 간밤에 난리를 떠올리자 다시 몸서리를 쳤다.

조씨는 이날 새벽 2시께 이웃의 도움으로 무사히 수해를 피할 수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쳐 마을에 침수 피해가 닥치던 때였다.

이웃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안방까지 들이친 토사를 치우던 한 주민은 비 피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조용히 담벼락을 가리켰다.

벽이 젖은 흔적이 액화수소(LP)가스통보다 더 높이 띠를 이뤘다.

어른 허리까지 침수된 것이다.

빗물에 쓸려온 토사는 발목까지 쌓여 마을을 관통하는 큰길을 뒤덮었다.

질퍽거리는 진흙은 발걸음을 어렵게 만들었다.

[르포] "무너지고 잠기고 터지고" 시간당 84㎜ 수마가 할퀸 철원
주민들은 대문을 활짝 열고 넉가래와 빗자루로 집구석까지 남은 토사를 치워내느라 바빴다.

공무원과 소방대원, 육군 3사단 장병들도 힘을 보탰다.

한해 농사를 망쳐버린 농가는 한숨이 깊었다.

마을 옆 산기슭에서 내려온 빗물이 미처 남대천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작은 하천에서 역류하면서 저지대 농경지가 침수됐기 때문이다.

수확기를 맞은 파프리카는 뿌리를 넘어 줄기까지 물에 잠기며 상품성을 잃어버렸다.

비닐하우스 가득한 물을 작은 펌프로 빼내고 물길을 새로 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농민 김영인(59)씨는 "물이 빠지더라도 사람으로 치면 숨이 이미 막혀버린 상황"이라며 "날이 더워지면 파프리카가 쪼그라들게 되는데 수확철에 날벼락을 맞았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생창리는 상습 침수지역인데 (철원군은) 배수펌프장 하나 놓아주지 않고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르포] "무너지고 잠기고 터지고" 시간당 84㎜ 수마가 할퀸 철원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는 철원 곳곳에서 잇따랐다.

근남면 잠곡리 관광지인 매월폭포 인근 펜션에서 단잠을 자던 관광객 9명은 이날 새벽 갑자기 닥친 물벼락에 꿀 같은 휴가를 망쳐버렸다.

마을 하천인 사곡천이 범람해 숙소까지 물이 들이쳤기 때문이다.

펜션 주인 윤모(78)씨는 "새벽 2시 30분께 갑자기 물난리가 나서 손님들이 짐을 챙겨 돌아가거나 대피했다"며 "내 잘못은 아니지만 미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펜션 마당은 물론 숙소 안까지 빗물과 진흙으로 엉망이었다.

[르포] "무너지고 잠기고 터지고" 시간당 84㎜ 수마가 할퀸 철원
철원군은 이날 자정부터 재난문자를 통해 "와수천과 사곡천, 생창리 저지대는 범람과 침수 우려가 있으니 저지대 및 하천 주변 주민들은 마을회관(서면 와수리)과 근남면사무소(근남면 육단리) 등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달라"고 알렸다.

근남면사무소에서는 이날 오전까지 주민 20여 명이 수해로부터 몸을 피했다.

거센 빗줄기는 도로도 엉망으로 만들었다.

수피령 정상에서 철원군으로 향하는 도로의 육단리 구간은 산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물로 도로 귀퉁이가 깎여나갔다.

도로를 따라 세운 광역 울타리는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매개체로 지목된 야생 멧돼지를 막고자 세운 울타리였다.

도로 맞은편 담장은 와르르 넘어졌다.

담장 너머로 군부대가 훤히 보였다.

굳게 서 있어야 할 담이었다.

[르포] "무너지고 잠기고 터지고" 시간당 84㎜ 수마가 할퀸 철원
갈말읍 지포리의 한 아파트단지는 말 그대로 포격을 맞은 듯 처참했다.

높이 두른 옹벽이 호우로 무너져내리면서 벽돌이 차량 5대를 덮쳤다.

그중 경차 1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주민 김모(57)씨는 "어제(2일) 밤 10시 20분께 갑자기 굉음이 들려서 어디가 벼락 맞고 무너졌나 싶어서 창밖을 내다보니 옹벽이 무너졌다"며 "사람이 안 다쳐서 다행이지만 내 차 2대가 망가져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철원군은 마을 곳곳의 피해를 집계하는 동시에 복구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 사흘간 300㎜의 집중호우가 쏟아진 강원 영서 지역에 내일까지 300㎜의 비가 더 내릴 것으로 예보돼 추가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르포] "무너지고 잠기고 터지고" 시간당 84㎜ 수마가 할퀸 철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