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고소인 향한 2차가해, 나와 관련한 기사 댓글서도 봐요"
"얼굴·실명 공개해야 '미투'" 주장에 "가해자 얼굴도 안 밝히는데 공개하니 '얼평' 당하더라"
"문제제기하자 매장되고 험담 퍼져" 서울대 성추행 피해자들

"박원순 전 서울시장 고소인을 향한 2차 가해성 발언들을 나와 관련된 기사 댓글에서도 봐요."(서울대 교수 성추행 피해자)

지난해 서울대 서문과 A교수가 성추행 혐의로 해임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최근 서울대 음대 B교수와 C교수 등이 제자 성추행 의혹으로 수사를 받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서울대 학내에서도 '권력형 성폭력' 문제가 연일 화두가 되고 있다.

해당 교수들은 일명 '알파벳 교수'로 불린다.

이들 사건 피해자들은 3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고소인을 향한 2차 가해가 자신들에게도 유사한 형태로 이뤄졌다며 이같은 행위를 멈춰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문제제기하자 매장되고 험담 퍼져" 서울대 성추행 피해자들

◇ 문제제기하려니 집단 회유…고소 이후엔 '매장'

지난달 22일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고소인 측은 "피해자가 성 고충을 인사담당자에게 언급하고 증거 자료를 보여주며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30년 공무원 생활 편하게 해줄 테니 다시 비서로 와달라', '이뻐서 그랬겠지' 등이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성추행 피해자들도 학내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고 한다.

음대 B교수의 피해자 D씨는 사건 이후 B교수의 동료 교수를 면담했으나 "스스로의 장래를 생각해서 인권센터에 신고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해당 교수는 "살다 보면 이보다 더 나쁜 일도 겪을 수 있다"며 D씨의 문제제기를 만류했다.

그럼에도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결심하자, 가해자 측근들이 피해사실을 왜곡 전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집단에서 소외당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음대 C교수의 피해자 E씨는 "성추행 고소 이후 음악계에서 매장당했다"고 말했다.

가해자의 동료 교수로부터 "고소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유가 왔지만 거부했더니 각종 모임에서 자연스레 소외되기 시작했고, 끝내 음악 활동이 끊기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E씨는 밝혔다.

서문과 A교수 피해자인 김실비아씨는 "교내 인권센터에 성추행 문제를 신고하자 같은 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나에 대한 험담이 퍼져나갔다"며 "'반바지를 평소에 즐겨 입어서 당한 거다', '작은 해프닝인데 과장한다' 등의 이야기가 학교 전체에 돌면서 처음에는 보직교수들조차 면담 요청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문제제기하자 매장되고 험담 퍼져" 서울대 성추행 피해자들

◇ "'왜 이제 와서'가 아니라 '신고하기 얼마나 어려웠으면' 생각해야"

서울대 피해자들은 박원순 전 시장 고소인을 둘러싸고 일부 인사들의 부적절한 발언들이 논란이 된 일을 두고도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박지희 아나운서는 지난달 14일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고소인을 언급하며 "4년 동안 대체 뭘 하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세상에 나서게 된 건지도 너무 궁금하다"고 말했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페이스북에 "'얼굴을 밝히지 않은 미투'는 어색한 말"이라는 글을 써 2차 가해 논란을 빚었다.

서울대 피해자들은 "나와 관련된 성추행 사건 기사에도 비슷한 내용의 댓글이 달렸다"며 "관련 기사를 보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D씨는 "'왜 이제 와서'가 아니라 신고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4년 동안 알리지 못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김실비아씨는 "피해자들이 몇 년 동안 잊고 살다가 갑자기 신고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당하자마자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지도 않고, 피해자들은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신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문제제기 당시 자신의 얼굴과 실명을 모두 공개했다.

하지만 그는 "가해자 얼굴도 밝히지 않는 세상에서 피해자가 얼굴을 밝혀야만 진정한 성추행 피해자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저는 사람들이 안 믿어줄까 봐 얼굴과 실명을 공개했지만,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기자회견을 해도 '얼굴평가'를 당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문제제기하자 매장되고 험담 퍼져" 서울대 성추행 피해자들

◇ "만연한 2차 가해 보고 숨죽이는 피해자 늘까 걱정"

피해자들은 나날이 거세지는 2차 가해 속에서 사회 어딘가에 숨어 있는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들이 신고를 주저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E씨는 "과거에 은하선씨가 음악 레슨 강사에 대해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폭로를 했을 당시 은씨가 여론에 의해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얘기했다가 매장당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즉각 미투에 동참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역공격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신고를 고민하는 사람이 문제제기를 포기하게 될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D씨도 "'미투' 운동 이후에도 권력형 성폭력은 만연하고, 여전히 이를 고발하는 행위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못하는 것 같다"며 "인생을 걸고 용기 낸 성추행 피해자가 신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제3자들로부터 비난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2차 피해 문제가 거듭되는 이유에 대해 처벌의 미비함을 지적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가 더 빈번해지는 것은 '미투' 운동에 대한 일종의 백래시(backlash·반발)와도 같다"며 "기존의 권력과 관행을 지키기 위해 가해자 연대체까지 나서 조직적으로 2차 피해를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현행법상 2차 피해에 대해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만 고소할 수 있어 처벌이 벌금형에 그친다"며 "성폭력특례법을 개정해 2차 피해도 성폭력 범죄의 연장선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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