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5일부터 ‘민간조사원’으로 불리던 이들이 ‘탐정’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25년차 베테랑 민간조사원인 데이비드 최 대표가 지난 27일 서울 상계동의 한 골목에서 명품 짝퉁공장을 잠복 감시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다음달 5일부터 ‘민간조사원’으로 불리던 이들이 ‘탐정’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25년차 베테랑 민간조사원인 데이비드 최 대표가 지난 27일 서울 상계동의 한 골목에서 명품 짝퉁공장을 잠복 감시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장맛비가 내리던 지난 27일 오후 1시 서울 상계동의 한 골목. 한 남성이 시동 꺼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안에서 30m 떨어진 건물 입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건물 지하 1층에 있는 ‘짝퉁’ 스포츠 의류 제조 현장을 적발하기 위해서다.

“업체 사장이 지금 트럭에 의류를 싣고 있습니다.” 그의 휴대폰 너머로 건물 반대편에 있는 부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재빨리 망원경을 꺼내 상황을 살핀 뒤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건물 지하 1층에 업체가 있는데 30분 전에 사장 부부가 직물을 차에 싣고 가는 걸 확인했어요. 날염과 로고를 옷에 입혀야 하니 인쇄업체로 갈 확률이 높겠죠? 오후 3시쯤 경찰이 오는데 그 전에 우리가 먼저 확인하는 겁니다.”

얼핏 스토커 같기도 한 그의 정체는 민간조사업체 대표인 데이비드 최씨(54).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탐정’이다. 지금은 탐정이란 명칭을 정식으로 쓸 수 없어 ‘민간조사원’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조만간 탐정이란 명칭을 명함에 새길 예정이다. 국회가 지난 2월 신용정보법에 담긴 ‘탐정 명칭 금지 조항’을 삭제하면서 다음달 5일부터 탐정업 명칭 사용, 탐정 사무소 개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수사 권한은 없어

산업스파이·해외도피자 추적…다음달 '한국판 셜록 홈스' 뜬다
한국에서 탐정이란 직업이 없던 것은 아니다. 탐정이란 용어를 쓰지 못할 뿐 민간조사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일을 한다. 교통사고·보험사기·의료사고 등의 조사, 산업스파이 적발, 해외 도피자 추적까지 업무 영역은 다양하다.

최 대표는 25년차 배테랑 민간조사원이다. 그는 이날 상표권 침해 제조업체의 운영 현장을 경찰이 검거하도록 돕기 위해 오전 11시부터 차 안에서 잠복근무를 했다. 유명 스포츠 의류브랜드 업체가 최 대표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과 달리 이들은 강제 수사 권한이 없다. 이리저리 현장을 뛰며 직접 정보를 모아야 한다. 이렇게 모은 정보는 수사 과정에서 증거로 쓰인다.

최 대표의 차 안에는 반팔셔츠, 골프용 셔츠, 점퍼 등 상의 세 벌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장시간 차 안에만 있어야 하는 그에게 여벌 옷과 휴대폰 충전기는 필수품이다. 끼니를 거르는 일은 일상이다. 용변 등 생리현상도 급하지 않으면 참는다.

“머피의 법칙이 작용해요. 8시간 넘게 잠복 대기하다 근처 사우나에서 잠깐 씻고 나온 사이 쫓던 사람을 놓친 적이 있었죠. 그런 일을 여러 번 겪고 나서는 되도록 참아요.”

차 안에서 대기한 지 4시간이 흐른 오후 3시께. 의류를 싣고 떠났던 불법 제조업체의 차가 다시 돌아왔다. 최 대표는 ‘현장 급습’을 위해 경찰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과 불법 제조업체가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99㎡ 남짓한 제조 현장에는 ‘짝퉁’ 의류가 수천 장 쌓여 있었다. 최 대표는 차량 트렁크에 보관해둔 마대자루 80여 포대에 의류 완제품 7334점과 각종 라벨 수천 개를 담았다. 오후 6시가 넘어서야 2t 용량의 화물차로 짝퉁 의류를 실어 보내며 이날의 일은 끝났다.

공권력 사각지대 해결

국내에서 활동하는 민간조사원은 8000명가량으로 추산된다. 민간 협회 아홉 곳이 민간조사원 자격증을 발급한다. 자격증을 취득하려면 범죄학과 범죄심리학, 법학개론, 민간조사학개론 등 4~5과목의 필기시험을 보고 실기 평가와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업계에 따르면 탐정 수임료는 교통사고 조사의 경우 300만~400만원, 상표법 위반이나 특허침해 사건은 수천만원에 달한다. 경찰행정학과, 경호학과 등이 있는 일부 대학은 탐정학과 설립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국대는 2018년 법무대학원에 탐정 전공을 신설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탐정 제도가 활성화됐다. 한국을 제외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모두 탐정 제도가 있다.

2007년 탐정법을 시행한 일본은 탐정 인구가 6만여 명에 달한다. 유우종 한국탐정중앙회 회장은 “탐정이라고 하면 ‘흥신소’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탐정도 변호사처럼 기업 비리 조사, 지식재산권 등 여러 전문 분야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탐정 제도를 법제화하려는 노력은 계속 있었다. 16대 국회부터 민간조사업법 논의가 있었으나 경찰청과 법무부 중 어디를 관리부처로 할지 등을 두고 논쟁이 붙어 표류해왔다. 20대 국회에서 ‘탐정 명칭 사용 금지’ 조항이 신용정보법에서 삭제됐지만 탐정 업무의 범위와 권한, 자격 등을 규정한 법조항은 아직 없어 후속 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현석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서 탐정업을 도입하면 연 1조3000억원 규모의 시장이 열리고 1만5000여 명의 고용이 창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에서는 2000년에 최초로 한국민간조사중앙회가 민간조사원 자격증을 발급해 20년간 2000여 명의 민간 조사원을 배출했다.

수사 경험이 있는 퇴직 경찰이 주로 탐정 시장에 뛰어들 것이란 예상이 많다. 한국특수직능교육재단에 따르면 대표적 탐정 관련 자격증인 PIA민간조사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올 상반기 547명이었다. 이 중 72.4%인 396명이 전·현직 경찰관이었다.

유 회장은 “탐정 제도는 검찰 경찰 등 공권력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각지대’ 사건을 어느 정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다은/양길성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