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시장의 64년 인생사

참여연대 만든 '시민운동 대부'
1인 시위·국회의원 낙선운동 주도

안철수와 단일화, 화려한 정치 입문
최장기 서울시장…'도시경영자'로

'성추행 혐의' 중압감에 무너진 듯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10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조문객들이 박 시장의 영정사진 앞에서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10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조문객들이 박 시장의 영정사진 앞에서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시민운동가이자 최장수 서울시장이었던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명함엔 한때 ‘소셜 디자이너’라는 직책이 붙어 있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열망이 담긴 단어였다. 임기 후반 2년을 막 시작한 지난 6일,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빗대어 열정적으로 소명을 실천하겠다던 그가 이렇게 허망하게 퇴장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최고의 도시경영자’
2011년 9월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한 식당에서 박 시장은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현 국민의당 대표)을 덥석 껴안았다. 백두대간 종주를 갓 마치고 턱수염이 덥수룩한 채였다. 그렇게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그는 2011년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35대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박 시장이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그 뒤 박 시장은 2014년·2018년 지방선거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역대 서울시장 중 3선에 성공한 사람은 박 시장이 처음이다. 기존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문법과 행동으로, 낯설지만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9년간 시장직을 이어왔다. 광화문광장에서 벼농사를 짓기도 했고, 서울의 동서남북을 자전거 도로로 잇겠다는 꿈도 꿨다. 대표적인 박 시장의 정책으로 꼽히는 ‘제로페이’와 ‘따릉이’는 시행 초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점차 서울시민의 생활을 바꿔놓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서울시의 고위 간부는 “도시경영에선 박원순 시장을 능가하는 이가 없다”고 촌평했다.
고한석 서울시 비서실장이 10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박 시장의 친필 유서를 공개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고한석 서울시 비서실장이 10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박 시장의 친필 유서를 공개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사라진 대권의 꿈
박 시장은 스스로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고 말해왔다. 1956년 경남 창녕에서 2남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 석 달 만에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반대하는 교내 시위에 참여했다 투옥된 뒤 제적됐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해 1980년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구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도 근무했지만 1년 만에 법복을 벗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수많은 시국사건 변호를 맡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시작에도 참여했다.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던 그는 1994년 영국 유학 생활을 마친 뒤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참여연대를 설립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참여연대 시절 1인 시위라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었다.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국회의원 낙천·낙선 운동을 주도했다.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를 차례로 창립하며 ‘시민운동의 대부’로 자리매김했다.

최장수 서울시장이었지만 대중적인 인기가 그리 높지 않았던 점은 박 시장에겐 고민거리였다.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박 시장의 지지율은 줄곧 2~3%대에 머물렀다. 박 시장은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지율은 바뀌는 것”이라고 언급해왔지만, 대중의 분위기에 민감해했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최근 그는 기존 ‘행정가’로서의 이미지에 변화를 주려 애쓴 것으로 전해진다. 공식적으론 대선 도전을 밝히지 않았지만, 도시 경영보다 국가 경영자로 거듭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한 측근은 “정(政)이 없고 치(治)만 있어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지인들의 조언을 박 시장이 인식하고 있었다”며 “단순한 행정가를 뛰어넘는 정치적 리더십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왜 극단적 선택 했나
그랬던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본인이 오랜 기간 쌓아올린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놓인 것에 대해 스스로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그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해왔다. 박 시장은 변호사 시절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맡아 수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승소를 끌어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성희롱이 범죄임을 인식시킨 국내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소송이었다. 2018년에는 서울시 여성정책을 총괄 보좌할 젠더특보를 임명하고, 여성권익담당관을 신설하는 등 여성 권익 보호에 적극적 행보를 보여왔다. 10일 새벽 박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되기 이틀 전, 전직 비서가 오랜 기간 성추행을 당했다며 박 시장을 경찰에 고소한 사실은 그래서 더욱 충격을 안겨줬다.
서울시장 3선에 대권 꿈꿨지만…"모두 안녕" 허망한 퇴장

하수정/박종관 기자 agatha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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