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준안 국무회의 의결…비준 안 하면 한-EU 통상 리스크도 커질 듯
'ILO 핵심협약 비준' 다시 시동 건 정부 "국격·국익 위한 일"

정부는 7일 '국격'과 '국익'을 내세우며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경영계의 반대로 발목이 잡힌 ILO 핵심협약 비준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정부는 올해 안으로 ILO 핵심협약을 비준할 방침이다.

◇ 노동부 "국격 고려할 때 ILO 핵심협약 비준 못 미뤄"
고용노동부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ILO 핵심협약 29호, 87호, 98호 비준안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비준안은 대통령 재가를 거쳐 이달 중으로 국회에 제출된다.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된 비준안을 21대 국회에 제출함으로써 ILO 핵심협약 비준에 다시 시동을 건 것이다.

임서정 노동부 차관은 브리핑에서 "'K-방역'으로 높아진 우리나라의 국격을 고려할 때 ILO 핵심협약 비준은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자, 선진국이 이행해야 할 당위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한국은 1991년 ILO 가입국이 됐지만, ILO 핵심협약 8개 가운데 29호, 87호, 98호, 105호 4개는 아직 비준하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1996년부터 국제사회에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24년째 못 지키고 있다.

ILO 가입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국격을 고려하면 ILO 핵심협약 비준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ILO에 가입한 187개국 가운데 8개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한 국가는 146개국(78.1%)에 달한다.

이 중에는 개발도상국도 다수 포함돼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6개국 중에서는 ILO 핵심협약 8개를 다 비준한 국가가 32개국(88.9%)이다.

임 차관은 "ILO 핵심협약은 전 세계 어느 노동자라도 기본적 노동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가장 보편적인 규범"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ILO 핵심협약 비준을 미루는 것은 과거 국내 상황의 '특수성'을 내세워 노동권을 탄압하던 시절의 잔재라는 게 노동계의 지적이다.

정부가 비준을 추진 중인 ILO 핵심협약 87호와 98호는 결사의 자유에 관한 것으로, 노사 양측이 자유롭게 단체를 설립해 권익 보호 활동을 하고 노사 교섭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내용이다.

이들 협약이 비준될 경우 국내에서는 노조 설립과 활동의 자유가 좀 더 확대될 수 있다.

정부가 이들 협약 비준을 위해 국회에 제출한 노조법 등 관련법 개정안은 실업자와 해고자뿐 아니라 5급 이상 공무원과 해직 교원의 노조 가입과 활동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직 교원의 노조 가입 문제는 전교조 합법화와도 직결된다.

전교조는 해직 교사를 조합원으로 뒀다는 이유로 2013년 법외 노조 통보를 받았다.

'ILO 핵심협약 비준' 다시 시동 건 정부 "국격·국익 위한 일"

◇ EU의 ILO 핵심협약 비준 압박도 고조
ILO 핵심협약 비준은 국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게 노동부의 입장이다.

유럽연합(EU)은 한국이 ILO 핵심협약을 미뤄온 게 한-EU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에 해당한다며 2018년 말 한-EU FTA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章)에 따른 분쟁 해결 절차에 돌입했다.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에는 양측이 ILO 핵심협약 이행을 위해 노력한다는 조항이 있다.

한국과 EU는 정부간 협의에서 입장 차이를 못 좁혀 작년 말 분쟁 해결 절차의 마지막 단계인 전문가 패널 소집에 들어갔다.

전문가 패널에서 한국이 한-EU FTA를 위반했다는 결론이 나올 경우 EU는 한국을 상대로 수출입 물량 제한과 같은 불이익 조치에 나설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한-EU FTA는 EU가 환경·노동 관련 조항을 넣어 체결한 첫 FTA이기 때문에 한국을 '본보기'로 삼아 강한 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임 차관은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ILO 핵심협약 비준은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뿐 아니라 우리 기업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일"이라며 "잠재된 통상 리스크를 해소하고 국익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 패널은 당초 올해 3월까지 보고서를 채택할 계획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활동이 지연됐다.

4월 초에는 패널 의장인 미국인 토머스 피넌스키 변호사가 세상을 떠나 후임자를 새로 선정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 다시 시동 건 정부 "국격·국익 위한 일"

◇ 노사 양측 반대에 쉽지 않을 듯
문제는 경영계가 국내 노사관계의 특수성을 이유로 ILO 핵심협약 비준에 강하게 반대한다는 점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이날 논평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의 극복, 기업과 산업의 경쟁력 회복 및 일자리 지키기에 매진해야 하는 시점에서 정부가 기업들이 노사관계에서 가장 곤혹스럽고 부담을 느끼는 ILO 핵심협약 비준을 추진하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경영계가 단기적인 시각에서 노동 분야의 '글로벌 스탠더드'인 ILO 핵심협약 비준에 반대만 할 게 아니라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노사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ILO 핵심협약 비준에 반대하는 목소리 중에는 사실과 맞지 않는 것도 많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노동부는 이날 별도의 자료를 내고 이 같은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노동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관련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해고자인 노조원이 임단협 협상에 나올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현행법으로도 교섭권을 정당하게 위임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임단협 협상에 나설 수 있다"며 법 개정으로 달라지는 게 아니라고 밝혔다.

또 관련법 개정으로 해고자인 노조원에게도 기업이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개정안은 현행 근로시간 면제(타임오프) 제도의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다"며 "해고자인 노조원의 급여는 노조가 지급하는 게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에 찬성하는 노동계는 정부가 만든 관련법 개정안에 경영계 요구가 일부 반영된 데 대해 반발하고 있다.

현행 최장 2년인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3년으로 확대하고 사업장 내 주요 시설을 점거하는 방식의 쟁의행위를 금지한 규정 등이 노동권을 후퇴시키는 '개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임 차관은 "정부의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관련법 개정안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사회적 대화를 거쳐 마련된 균형 잡힌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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