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강경세력 반대…사회적 대화 주체로서 신뢰에 '상처' 지적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내 소수 강경파의 저지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가 물 건너갔다.

조합원 규모 면에서 '제1 노총'에 등극한 민주노총이 노사정 대화의 신뢰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느냐는 의구심도 커지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 다시 확인된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트라우마'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1일 오전 정세균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협약식'에 참석해 노사정 대표자회의 합의문에 서명할 계획이었지만, 반대파에 의해 사실상 감금돼 협약식에 불참했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원 포인트' 노사정 대화를 가장 먼저 제안한 당사자인 김 위원장이 합의문 서명에 불참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합의문은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해고 대란을 막기 위한 노사정의 협력 방안을 담은 것으로, 민주노총의 의견도 반영됐다.

특히, 민주노총은 노조의 보호를 못 받는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 보호 대책을 합의문에 담는 데 역점을 뒀다.

민주노총 내부에서 노사정 합의 반대를 주도한 것은 일부 강경파 세력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지난달 29∼30일 김 위원장이 잠정 합의안 추인을 위해 소집한 중앙집행위원회(중집)에서도 합의안에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금속노조를 포함한 일부 산별 노조 대표와 지역본부 대표들은 합의안이 노동계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부가 약속한 고용 유지 지원 대책이 충분하지 않은 데다 모호한 부분이 많다고 비판했다.

경영난에 처한 기업이 고용 유지를 위해 노동시간 단축과 휴업 등을 할 경우 노동계가 협력한다는 합의안 내용도 정리 해고에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노사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노사정 대화에서 명확한 표현을 쓴 합의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들의 요구는 무리한 면이 있다.

합의안은 노동계의 요구도 상당 부분 반영됐다.

경영계는 고용 유지의 반대급부로 노동계가 임금 인상을 양보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결국 합의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노동계의 반대가 통한 것이다.

김명환 위원장은 노사정 대표자회의 첫 본회의에서부터 경영계와 주고받기식 협상은 안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노사정 대표자회의 합의안은 내용상 일부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라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아 노사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극복할 분위기를 만들 전기가 될 수 있었다.

민주노총 내부에는 노사정 대화 자체에 반대하는 정파들도 있다.

이들은 노동자의 권익은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관점에 입각해 대화를 불신한다.

섣불리 노사정 대화에 참여했다가 정부의 '들러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게 이들의 우려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인 1998년 노사정위원회 합의에 참여했다가 내부 반발로 지도부가 사퇴하는 등 내홍을 겪은 민주노총에는 노사정 대화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다.

2005년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위 참여 안건을 부친 대의원대회에서는 반대파가 소화기와 시너를 뿌리는 난동을 벌이기도 했다.

◇ 일각서 노조 이기주의 비판도
민주노총 내부에서 합의안에 대한 반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소수 강경파가 김 위원장의 협약식 참석을 사실상 물리력으로 저지한 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거 운동 방식에서 못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9∼30일 중집에서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추인을 얻지 못하자 협약식 당일인 이날 아침 다시 한번 중집을 열어 의견 수렴을 하려고 했지만, 강경파의 회의장 난입으로 회의를 열지도 못했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노조 이기주의'의 소치로 보기도 한다.

국가적 차원의 노사정 합의가 가장 필요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한 취약계층이다.

대부분 무노조 영세 사업장에 속한 이들은 노조의 보호를 못 받기 때문에 국가적인 단위에서 만들어진 협약이 조금이나마 권익 보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번 노사정 합의안에도 노동계의 요구에 따라 취약계층 보호 대책이 다수 포함됐다.

유급휴업·휴직을 한 기업에 대해 정부가 휴업·휴직수당의 일부를 지급하는 고용유지지원금의 혜택이 파견·용역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충분히 돌아가도록 한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방안이 합의안에 포함됐음에도 일부 노조 활동가들이 취약계층의 어려운 현실은 외면하고 대화를 불신하는 이념에 따라 관성적으로 반대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강력한 노조의 보호를 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부분의 문제를 노사 교섭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의 노사정 합의는 사실상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사사건건 추인을 받아야 하는 민주노총의 의사 결정 구조를 문제 삼는 시각도 있다.

김명환 위원장은 2017년 말 사회적 대화 참여를 내걸고 직선으로 당선돼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참여를 추진했지만, 대의원대회에서 강경파의 반대로 번번이 좌절됐다.

이번에도 김 위원장이 들고 온 합의안은 중집 논의에서 막혔고 결국 행동에 나선 소수 강경파가 김 위원장의 합의문 서명을 물리력으로 저지했다.

◇ 민주노총 사회적 대화 참여 당분간 힘들 듯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동력이 크게 떨어지게 됐다.

100만명의 조합원이 속한 사회단체이자 노동계를 대표하는 제1 노총인 민주노총이 그 위상에 걸맞지 않게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고, 사회적 대화의 주체로서의 신뢰에도 씻기 어려운 상처가 생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 안팎에서는 과연 민주노총과 사회적 대화를 할 수 있겠느냐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민주노총은 작년 말 고용노동부 집계상 조합원 수가 한국노총을 처음으로 앞질러 제1 노총이 됐다.

민주노총이 요구만 할 게 아니라 책임도 다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했다.

이에 부응하듯 민주노총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노사정 대화를 제안했고 대화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합의 이행 점검을 민주노총이 불참하는 경사노위에서 맡는다는 점은 제약 요인이었지만, 다양한 회의체도 합의 이행 점검에 활용하기로 한 만큼 민주노총이 참여할 여지가 남은 상황이었다.

이번에 합의에 도달했을 경우 민주노총이 국정 운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노동계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합의 무산 사태로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의 중심에서 다시 밀려나면 한국노총이 노동계를 대변하며 사회적 대화를 이끌고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노총은 이날 노사정 합의 무산에 대한 논평에서 민주노총이 취약계층의 고통을 외면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한국노총은 "비록 최종 합의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잠정 합의 내용은 경사노위에서 충실히 논의되고 이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