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힘으로 도시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100억원 규모의 ‘광역협치형 시민참여예산 사업’이 졸속 심사로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업 후보군 중 절반가량은 서울시가 이미 시행하고 있는 사업과 중복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는 내년도 예산에 반영하기 위해 이 사업을 비롯해 700억원 규모의 시민제안사업 공모를 하고 있다. 예산 편성에 시민을 직접 참여시킨다는 취지는 좋지만, 검증 과정이 부실하게 이뤄지면 대규모 예산 낭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적격’ 판정 사업이 서류심사 2위

18일 한국경제신문이 입수한 광역협치형 시민참여예산 사업 검토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의 각 사업부서가 시민들이 제안한 사업을 검토한 결과, 접수된 전체 84개 후보 사업 중 39개(46.4%)가 이미 시에서 추진하는 사업과 중복돼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참여예산 사업은 시민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서울시 담당 사업부서가 검토한 뒤 민·관으로 구성된 예산협의회 심사 등을 거쳐 시행된다. 총 사업 규모는 100억원이고, 사업당 최대 5억원의 예산을 지원한다.

현재 사업부서의 검토와 서류심사를 통해 최종 선정 사업의 1.5배수까지 추린 상태다. 하지만 서류심사를 통과한 44개 사업 중에도 중복 사업이 18개(41.0%)나 포함된 것으로 분석됐다. 면접심사와 최종 시민투표 과정을 통해 44개 사업 중 3분의 1가량이 추가로 걸러지더라도 중복 사업이 대거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예로 서류심사를 2위로 통과한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자립 콜센터’ 사업도 서울시 담당 사업부서인 여성가족정책실 가족담당관으로부터 시가 벌이고 있는 사업과 중복된다는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서울시는 이미 ‘아동자립지원사업단’을 통해 보호종료아동을 대상으로 한 상담 콜센터는 물론 각종 교육 및 취업, 주거 지원 사업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서류심사 졸속” 지적도

서류심사에 참여했던 민간위원들은 100억원 규모의 대형 사업이지만 심사 과정이 졸속으로 진행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합격선을 넘은 사업을 임의로 떨어뜨리고, 탈락한 사업을 대신 붙이는 일도 벌어졌다. 전체 사업을 네 개 그룹으로 나눠서 심사했는데 그룹별로 합격한 사업 수가 크게 벌어지자 “나중에 형평성 문제가 일 수 있다”며 일종의 ‘마사지’를 한 것이다.

심사에 참여했던 공익제보자 이상돈 서울시 시민참여예산위원회 위원은 “평가가 끝난 뒤 점수와 상관없이 임의로 사업의 합격과 불합격을 조정하는 것은 위원회의 권한을 벗어난 조치”라고 지적했다. 이동식 서울시 서울협치담당관은 “심사가 100% 완벽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앞으로 개선해나가겠다”면서도 “(임의로 합격 사업을 바꾼 것은) 위원들의 합의로 진행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