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의용군 등으로 전후방서 활약…고난도 첩보업무도 수행
국군에게 결정적 첩보 제공해 전투 승리 이끌기도
[6.25 전쟁 70년] 자원해 전장 누빈 '군번 없는' 여성들

올해로 70년을 맞는 6·25 한국전쟁을 떠올릴 때 좀처럼 조명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여느 군인처럼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정확한 참전 인원조차 집계되지 않은 '여군'이다.

14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현재까지 확인된 참전 여군 수는 2천400여명이다.

일부는 육·해·공군에 입대해 현역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군번이나 계급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활동한 이들이 대부분이라 밝혀지지 않은 사례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나이에 포화 속으로 뛰어든 학도의용군부터 적진에서 게릴라전을 펼친 유격대원, 전투의 숨은 공신이 된 교사까지 '군번 없는 여전사'들의 활약상은 다양했다.

그러나 국가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모두 다를 바 없었다.

◇ 열여섯에 포화 속으로…여성 학도의용군
전쟁 발발 직후 학업을 중단하고 전장으로 뛰어든 이들은 남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열여섯 남짓한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들 역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전·후방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이들은 1951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이 '학생 학교복귀 지시 담화'를 발표하기 전까지 전투를 지원하거나 부상병을 치료하며 자신들이 배속된 군단의 작전 성공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1950년 10월 동부전선에서 공격 임무를 부여받고 강릉에 주둔하던 제1군단에는 강릉지역 여학생들이 합류했다.

강릉사범학교 여학생 29명과 병설중학교 여학생 2명은 부모를 설득해 군에 지원서를 제출하고, 약 5개월간 원산에서 주을까지 부대를 따라 북진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 여자학도의용군은 때로는 천막에서, 때로는 폐허가 된 건물 마룻바닥에서 북한군의 기관총 소리를 들으며 뜬눈으로 추위와 싸웠다.

당시 17세였던 강릉사범학교 학도의용군 출신 최용인씨는 2011년 국가보훈처에 보낸 서신에서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언급하며 "그때를 생각하면 61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아프고 저려온다"고 쓰기도 했다.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자진해 참전한 여성 학도의용군도 많았다.

낙동강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군의 최전방 고지에서 대북방송을 해 인민군 45명을 귀순시킨 인천 소하고등학교 학생 금숙희, 피란 중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구출된 후 종군하며 부상자 간호활동을 한 숙명여대생 오기환 등이 대표적이다.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 "여성 학도의용군의 참전활동 사례는 수없이 많을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참가 규모나 활동내역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북한군 점령지의 '여성 유격대원'들…촌부로 가장해 첩보활동도
북한군 남침 이후 국군은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까지 후퇴를 거듭했다.

이때 구월부대, 백호부대, 백마부대 등 유격대들은 북한군 점령지역에 남아 정규군이 수행하기 어려운 게릴라전을 벌이며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이 가운데 구월부대의 전신인 '구월단 유격대'에는 여성 대원 수십명이 배속돼 황해도 일대에서 정보수집·간호·교육·공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구월산 유격대가 북한군 패잔병이나 빨치산 부대와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데는 '구월산의 여장군'으로 불렸던 이정숙 대원의 공이 컸다고 한다.

[6.25 전쟁 70년] 자원해 전장 누빈 '군번 없는' 여성들

전쟁 직전 공산군 손에 부모와 남편을 잃은 이정숙은 1950년 10월 황해도에서 무장대원 70여명과 농민군을 모아 '서하무장대'를 조직했다.

이후 이 병력을 이끌고 김종벽 대위가 이끄는 구월산 유격부대에 합류해 김 대위의 보좌관을 맡았다.

이정숙은 북한군 습격을 위한 월사리 반도 상륙작전, 어양리 상륙작전 등 다양한 특수작전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1951년 1월에는 시골 아낙 모습으로 가장하고 100리 길을 걸어 북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고립된 유격부대원 89명을 구출하는 공훈도 세웠다.

이밖에 피란 중 백마부대에 자원입대해 첩보임무를 맡은 임용녀 여군부장 등 50여명의 여성 대원들, 기밀문서 탈취·항공폭격 유도 등 고난도 임무를 수행한 켈로(KLO)부대 첩보대원 등 여성들의 유격대 활동은 국군의 작전에 적잖은 힘이 됐다.

◇ 전투의 숨은 공신…밤새 달려 국군에 첩보 전달한 교사
직접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국군에게 결정적 첩보를 제공해 작전 성공을 이끈 일반인도 있었다.

1950년 7월 6일. 전쟁 발발 10여일 만에 2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충북 충주지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당시 피난하지 않고 충주 동락초등학교에 남아 있던 스무살 교사 김재옥에게 북한군이 국군 상황을 물어왔다.

김 교사는 기지를 발휘해 "이 일대에서는 국군이 모두 철수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북한군이 여유롭게 군장을 풀고 쉬는 동안 김 교사는 학교 뒷문으로 빠져나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국군을 찾기 위해 산길을 달렸다.

부용산에서 매복 중이던 국군을 간신히 만나 북한군 동향을 전달했고, 국군은 어둠을 틈탄 기습 작전으로 1개 연대를 섬멸했다.

당시 국군의 병력은 300여명으로, 교정을 점령한 북한군과는 7배 가까운 규모 차이가 있었지만 김 교사의 기지 덕분에 동락리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김 교사의 삶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전쟁과 여교사'(1966)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현재 동락초등학교에는 김 교사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과 현충탑이 세워져 있다.

[6.25 전쟁 70년] 자원해 전장 누빈 '군번 없는' 여성들

/연합뉴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