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용군 제2기생 자원입대…"싸워서 살아남았다"
"수많은 목숨 앗아간 전쟁 절대 반복돼서는 안 돼"
[6.25전쟁 70년] "밤엔 울고 낮엔 총검술" 전장 누빈 여군 장원순
"밤에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다가 낮에는 정신 차리고 총과 검을 배웠지. 밤에는 소녀였다가 낮에는 전사가 되는 거야"
6·25 전쟁터를 누볐던 여자의용군 제2기생 장원순(86) 할머니는 전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여성 최초 영관급 지도자인 김현숙 대령은 남학생이 군에 입대하는 모습을 보고 여자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여자의용군 창설을 건의했다.

당시 모집 인원은 500명이었으나 실제 지원한 인원은 2천명 이상이었다.

1950년 8월 초순 창설된 여자의용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이어 북위 38도선을 돌파, 북진하던 시기에 제2기생을 모집했다.

경기도 수원에 살고 있던 16살 소녀는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가 "도망만 치다 끌려갈 바엔 당당히 싸우겠다"는 마음으로 자원입대했다.

장 할머니는 "언제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갈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무력하게 공포에 떨고만 있느니 싸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모집 결과 여자의용군 제2기생들은 중등학교 이상 재학생과 졸업생이 주로 지원했으며, 대학생과 교사들도 다수 포함됐다.

선발된 제2기생 384명은 12월 여자의용군 훈련소에 입소했다.

김 대령에게 총검술과 사격술을 배운 장 할머니는 이후 여자의용군을 훈련하는 조교로 발탁됐다.

그해 12월 17일 훈련을 수료한 여자의용군 제2기생들은 수료식 후 서울 시내를 행진해 경무대까지 이동했다.

경무대로 도착한 여자의용군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인사하자 그는 "어린 딸들이 이 추운 겨울에 전방에 나가서 고생하게 됐는데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교육이 시작된 후 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하다 다시 서울을 내어주는 상황에 이르렀다.

서울에 있던 여자의용군 훈련소도 부산시 대신동에 위치한 경남상업고등학교 기숙사로 이동했다.

열차 이동이 어려워 인천 송도항으로 이동해 상륙함(LST)에 승선해 부산까지 이동했다.

모든 보급품을 열차로 실어 보냈기 때문에 이틀 동안 주먹밥 한 끼로 배고픔을 이겨내야 했다.

장 할머니는 "상륙함 가장 바닥에서 짐과 함께 부산으로 가는데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그날을 회상했다.

그는 "같이 입대한 친구가 몸이 아파 함께 상륙함에 탄 군인들에게 물이라도 달라고 애원했었다"고 그때 기억을 떠올렸다.

[6.25전쟁 70년] "밤엔 울고 낮엔 총검술" 전장 누빈 여군 장원순
부산으로 이동한 여자의용군 제2기생은 여자의용군 훈련소, 전방 군단 및 사단, 정훈대대, 국방부 및 육군본부, 야전재무대, 통신부대, 총기재생창 및 총포창, 예술대, 육군병원 등으로 배치됐다.

육군본부 행정업무를 담당한 장 할머니는 전장 등에서 오는 서류를 받고 보내는 역할을 맡았다.

부대 배치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 군과 북한군이 어느 지점에서 싸우고 있는지, 몇 명이 죽었는지 등을 추려내는 생생한 현장에 있었다.

여자라고 무시하는 남자군인과 말다툼을 하거나 기합을 주는 일도 있었다.

장 할머니는 "친분이 있는 본부사령의 차를 타고 이동하면 남군들이 어린 여자가 본부사령과 함께 있다고 시기하기도 했다"며 "경례를 안 하면 기합을 주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낸 장 할머니는 이듬해 8월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제대했다.

여자의용군은 1950년 말까지 2개 기수 974명이 배출됐다.

두려웠지만 사명감으로 여군 생활을 보냈다는 장 할머니는 "함께 싸웠던 동기들의 소식도 알지 못한 채 70년이 흘렀다"며 "가족이 그리워 함께 이불을 덮고 밤을 보냈던 여군들의 소식이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는 "살기 위해 싸웠고, 싸워서 살아남았다"며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전쟁은 절대 반복돼서는 안 되며, 평화롭게 우리나라를 지켜나가자"고 강조했다.

[6.25전쟁 70년] "밤엔 울고 낮엔 총검술" 전장 누빈 여군 장원순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