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시간 있지만 유명무실…주차관리·청소·택배받기 등 업무범위 논란
'입주민 주관적 판단으로 해고 가능' 취업규칙 독소조항도 문제
숨진 아파트 경비원 떠난 자리에 구멍난 제도는 여전
"경비가 맞고 억울한 일 당해서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 달라."
'주민 갑질'에 시달린 끝에 세상을 등진 서울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 고(故) 최희석씨가 숨지기 전에 음성 유서로 남긴 말이다.

그는 지난달 21일 주차 문제로 주민 A씨와 다툰 뒤 이후 A씨로부터 지속해 폭언과 협박, 폭력 피해를 받다 이달 1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씨가 생전 남긴 경비일지와 근로계약서, 취업계약서는 경비노동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호한 휴게시간, 현행법상 요건이 사실상 무의미해지는 업무 범위, 언제든 '주민 갑질'을 당할 수 있는 취업규칙 내 독소조항 등이 널리 퍼져 있다고 노동현장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숨진 아파트 경비원 떠난 자리에 구멍난 제도는 여전
◇ 모호한 휴게시간…"사실상 24시간 노동"
'2020년 5월 3일 경비일지. 가로등 점등시간 19시 30분, 소등시간 05시 40분.'
최씨의 경비일지에는 매일 가로등 점·소등시간이 기재돼 있었지만 휴게시간은 늘 빈칸이었다.

경비일지 양식이 바뀌기 전인 작년 12월21일까지는 일지에 휴게시간을 적는 칸조차 없었다.

2018년 8월부터 해당 아파트에서 일하기 시작한 최씨는 오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24시간 격일제로 근무했다.

양식이 바뀐 작년 12월22일 이후 일지에는 24시간 중 점심과 저녁 식사시간 각 2시간, 오후 11시∼다음날 오전 5시 심야 휴게시간 6시간으로 총 10시간이 휴게시간으로 지정돼 있었다.

그러나 최씨의 경비일지에서 휴게시간이 기재된 날은 지난 4월13일 단 하루였다.

당일에만 '점심 12∼14시, 저녁 18∼20시, 심야 0∼2시 취침'이라는 휴게시간 내역이 적혔다.

다른 날에는 저녁식사 시간인 오후 6∼8시 등에 가로등 점등 시간이 적히는 등 휴게시간에도 업무를 한 기록이 수두룩했다.

휴게시간이 온전히 보장된 날이 있었다고 가정해도 최씨가 제대로 쉬기는 어려운 여건이었다.

별도 휴게공간이 없는 탓이다.

오가는 주민들의 눈에 그대로 띄는 경비실에 머무르면서 마음 편히 휴식하기란 어렵다.

김선기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교육선전국장은 31일 "야간수당을 줄이려고 휴게시간을 길게 잡는 것"이라며 "완전히 휴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비노동자는 사실상 24시간 근무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숨진 아파트 경비원 떠난 자리에 구멍난 제도는 여전
◇ 현실과 동떨어진 경비업법…경비·관리 업무 동시에
'2019년 1월 31일. A호 차량정리 잘하라 민원. 주민들 불만 차량 전혀 정리 안 된다 함.', '2020년 1월 4일. B호 민원 현관 앞 차 대지 말라 함. C호 차 밀지 말라 함.'
최씨의 생전 경비일지에는 주차 관련 민원이 여러 차례 나온다.

현행 경비업법에 따르면 경비용역회사 소속으로 아파트와 같은 시설경비를 맡은 경비원이 할 일은 '도난·화재, 그 밖의 혼잡 등으로 인한 위험발생을 방지하는 업무'로 규정돼 있다.

하지만 최씨의 경비일지에는 항상 '음식 폐기통 물청소', '분리수거', '담배꽁초 청소', '주차 관리' 등 관리업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처럼 법적으로는 시설경비와 관리업무가 분리돼 있으나 이를 엄격히 적용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두 업무의 분리를 강제하고 경비노동자가 관리업무를 맡지 못하도록 할 경우, 대부분 고령인 경비노동자의 대대적 감원이 우려되는 것도 주된 이유 중 하나다.

경비와 관리 업무를 분리하면 입주자대표회의 측이 기존 경비원을 해고하고 전자경비 시스템을 도입하고 시설관리는 별도 인력을 채용하겠다고 나설 수 있다.

그러면 현재 근무하는 고령의 경비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될 우려가 크다.

경비업법 소관 기관인 경찰청도 올해 6월부터 아파트 경비원에게 경비업무 외 다른 업무를 맡기는 경우 경비업법 위반으로 단속하려고 했다가 현장 혼란을 우려해 계도기간을 올해 말까지 연장했다.

반대로 업무를 통합한다고 해도 업무 확대로 임금이 인상되고 일자리 수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오표 서울 성북구 노동권익센터장은 "경비원이 관리업무도 하게 되면 임금이 현재보다 1.5배 이상으로 오를 수도 있다"며 "이 경우 고령층이 경비원 일자리를 잃는 등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어 신중히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숨진 아파트 경비원 떠난 자리에 구멍난 제도는 여전
◇ '갑질' 여지 남기는 취업규칙 독소조항
최씨가 근무한 아파트의 취업규칙에 입주민의 '갑질'이 싹틀 여지를 남기는 독소조항이 존재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당 아파트의 취업규칙 제42조는 '입주민의 편의 서비스 제공과 친절 등 그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때', '입주자대표회의 3인 이상 또는 아파트 입주민 10인 이상이 연대 서명으로 직원의 해임 요청이 있을 때' 등의 사유로 경비원의 해고가 가능하다고 정했다.

입주자들의 자의적 판단으로 경비원 해고가 가능하도록 악용될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해 개정된 근로기준법에는 '직장 내 괴롭힘 예방 및 발생 시 조치 등에 관한 사항'이 취업규칙 필수 기재사항으로 추가됐으나 최씨의 취업규칙에서는 해당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민 갑질'과 부당해고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은 최씨뿐만 아니라 매우 많은 경비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이다.

'아파트 경비노동자 고용안정을 위한 조사연구 및 노사관계 지원사업 공동사업단'이 전국 15개 지역의 경비노동자 약 3천400명을 상대로 조사해 지난해 11월 발간한 '전국 아파트 경비노동자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응답자의 24.4%가 입주민으로부터 비인격적 대우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부당하게 해고당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11.1%였다.

이오표 센터장은 "직장 내 괴롭힘 행위자 개념을 사용자·근로자에서 소비자 등 제3자로까지 확대하라는 최근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를 관련법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며 "경비원을 '일 적게 하고 돈 버는' 시혜적 일자리로 보는 입주민의 인식 변화와 정부 주도의 논의기구를 통한 사회적 협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