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5월 40년 동안 개개인의 삶의 토대로 자리 잡아
'아직도 말하기 어려운 5·18' 풀어야 할 과제
[당신의 5·18] 5월의 기억으로 현재를 사는 12명의 이야기
'왜 우리가 아닌, 당신의 5·18인가?'
연합뉴스는 광주 안의 역사 혹은 특정 세력의 이념으로 수시로 폄하되는 5·18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싶어 12명의 평범한 이들을 만났다.

'나와 우리의 5·18'을 묻는 대신 '당신의 5·18'의 의미를 물은 것은 다른 이들의 생각을 토대로 40주년 이후 우리 모두의 5·18의 의미를 찾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5·18 사진의 주인공 조천호 씨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아버지가 가족 곁을 지키지 못하고 희생당한 이유를 성장과 함께 이해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5·18 버스 운전기사 황희덕 씨에게 5·18은 당시 계엄군의 잔혹성을 피해 도망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아있었다.

동료 교사들과 5·18 교과서를 만드는 박래훈 교사는 40년 동안 5·18의 의미가 이어진 동력을 고민하며 현재를 살고 있었다.

5·18 당시 택시 운전사 남편을 찾아 만삭의 몸으로 광주의 참혹한 거리를 걸었던 송미령 씨는 5·18을 "우리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로 여겼다"고 말했다.

5·18 사적지를 다크투어리즘 현장으로 보존하는 신영환 광주시 주무관은 '빨갱이'라는 말로 5·18을 폄훼하는 집단에 맞서 "왜곡된 역사 인식을 바꿔보자"는 오기로 5·18을 후대에 남기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5·18 기념재단 차종수 팀장은 1980년 5월 계엄군에 끌려가고, 학생운동 하다 구타·고문당한 후 후유증에 시달리다 숨진 형을 떠올리며 '5·18이 자신과 가족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자문하며 살아간다.

[당신의 5·18] 5월의 기억으로 현재를 사는 12명의 이야기
전남대 5·18연구소 임정섭 조교는 해마다 광주의 거리에서 반복되는 5월의 행사보다는 5·18 유공자들의 개인적 아픔 속에서 5·18의 의미를 찾았다.

1980년 5월 18일에 태어난 김소형 씨는 갓 태어난 자신을 보러 광주로 왔다가 밖에서 들리는 총성에 창문을 솜이불로 막으려다 총탄에 맞아 숨진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의 의미를 성장과 함께 배워가며 자신만의 5·18의 의미를 되새겼다.

해직언론인 고승우 씨는 5·18 당시 비겁하게 정부의 나팔수 노릇을 했다는 언론 전체에 대한 불명예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며 5·18의 현재를 살고 있다.

1980년 5월 총을 들고 전남도청을 지켰던 김근태 화백은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딛고 5·18 40주년을 맞아 '오월 별이 된 들꽃'이라는 주제로 기획전시회를 열었다.

광주에서 5월을 겪고 트라우마에 캐나다로 이민 간 이윤희 씨는 이역만리에서 5·18 진상규명을 위해 5·18 북미 동지회를 조직, 해마다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잊힌 시민군을 영화로 기록한 청년 감독 김상우 씨는 "10대에서 20대 초반이었던 5·18 시민군이 지금은 중년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고 5·18의 미래를 고민했다.

[당신의 5·18] 5월의 기억으로 현재를 사는 12명의 이야기
40주년을 맞이한 5·18 민주화운동은 기나긴 세월 동안의 기억과 되새김을 거쳐 항쟁을 겪은 당사자들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의 삶의 토대가 됐다.

각자에게 5·18의 의미는 달랐지만, 역사의 아픔과 비극을 현재를 살아가는 동력으로 삼는 우리의 모습은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5·18은 누군가에게는 어렵고, 누군가에겐 입에 담기 힘든 주제였다.

정치 권력이 바뀔 때마다 폄훼와 왜곡의 대상이 되는 5·18의 현주소를 반영하는 분위기도 읽혔다.

갖가지 이유로 "5·18에 대해 말하기 곤란하다"며 인터뷰를 고사한 이들이 5월의 의미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당신의 5·18'의 마침표를 찍는다.

(조근영, 여운창, 전승현, 형민우, 손상원, 장덕종, 장아름, 박철홍, 정회성, 천정인 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