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만에 정당방위 재심 청구…"아직 숨은 피해 여성 많아 결심"
강제 키스 혀 절단사건 당사자 "나의 용기로 사회가 바뀌었으면"
"나는 무죄입니다.

56년이 지난 이제는 우리 사회가 바뀌었을까요?"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고 56년 만에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며 재심을 청구하는 최말자(74) 씨는 4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당당하고 또렷하게 56년 전 아픈 기억을 꺼냈다.

1964년 5월 6일 오후 8시.
당시 18살이었던 최 씨는 자신의 친구 지인인 21살 남성 노모 씨와 좁은 길에서 마주쳤다.

노 씨는 갑자기 최 씨를 쓰러뜨린 뒤 성폭행을 시도했다.

노 씨는 넘어진 충격으로 순간 정신을 잃은 뒤 정신을 차린 순간 입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 무언가를 힘껏 깨물며 저항했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인 노 씨의 혀가 1.5㎝가량 잘렸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을 정도로 놀란 상태였다고 최 씨는 설명했다.

보름 뒤 흉기를 든 노 씨가 친구들과 함께 집을 찾아와 상해를 입었다며 행패를 부렸다.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던 최 씨는 소환장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검찰을 찾았다.

검찰에서 채 한 평이 안 되는 방안에 갇혀 있던 중 갑자기 구속됐다.

자신이 상해 피의자가 됐다는 사실도 그 이후에 알게 됐다.

성폭행 가해자인 노 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데 피해자인 자신만 구속되고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 씨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최 씨는 "정당방위라고 계속 이야기했지만, 검찰은 듣지 않고 욕을 하고 위협하면서 '고의로 그랬지'라는 말만 계속했다"며 "나를 영장도 없이 구속한 검찰이 노 씨에 대해서는 강간미수 혐의를 뺀 채 기소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도 고통의 연속이었다.

재판부가 처음부터 "피고에게 호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 "피고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는가"라고 되묻는 등 심각한 2차 가해를 했고, 당시 언론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당시 언론은 '키스 한 번에 벙어리', '혀 자른 키스' 등 남성이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보도해 최 씨를 절망에 빠트렸다.

최 씨는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 난 뒤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힘겹게 살았다.

와이셔츠 공장과 노점상 등을 전전하며 홀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60살이 넘어 뒤늦게 만학도의 길로 들었고 지난해 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했다.

최 씨는 2018년 쏟아지는 미투 고발 속에서 방송통신대 동료 학생의 도움을 받아 서울에 있는 한국여성의전화 문을 두드렸다.

여성단체와 학교 동기 등과 함께 당시 판결문과 기사를 찾아가며 증거를 모았고 변호인단 도움을 받아 재심을 준비했다.

아픔의 기억을 다시 꺼내기 힘들었지만, 최 씨는 사건 발생 56년째 되는 2020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다.

최 씨는 "억울한 상처에도 힘이 없고 길을 몰라서 이렇게 살아왔지만, 배움을 통해 용기를 내게 됐다"며 "56년이 지나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비슷한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많은 것 같고 수사기관과 재판부의 2차 가해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재심 청구로 아직 용기 내지 못한 여성이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상처를 회복했으면 좋겠다"며 "여성이 보호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이번 재심 청구가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