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미술품 거래 양상 살핀 신간 '미술시장의 탄생'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어떻게 한국 대표 유물이 됐나
국보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과 '백자 달항아리'. 세련된 고려청자와 단아한 조선백자를 상징하는 유물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한국 대표 문화재로 인식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문화재 지정 기준에서 대략 확인된다.

국보와 보물은 문화재 중에서도 중요성, 가치, 희소성 등이 있어야 한다.

아름답고 역사성이 있으며 희귀해야 좋은 유물인 셈이다.

물론 훌륭한 문화재는 상품성도 있다.

문화재를 돈으로 환산하는 행위는 다소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엄연히 고미술 시장은 존재한다.

국보와 보물도 개인 소유라면 국내에서 거래가 가능하다.

신간 '미술시장의 탄생'은 개항기부터 광복 이전까지 골동품 시장이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과정을 분석한 책이다.

일간지 미술·문화재 전문기자로 활동하는 손영옥 씨가 2015년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한국 근대 미술시장 형성사 연구'를 보완해 단행본으로 펴냈다.

개항 과정에서 한국 미술시장에 역동성을 부여한 서양인들이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거 퇴장한 뒤 주도권을 쥔 사람들은 일본인이었다.

그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려청자가 인기 있는 문화재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졌다.

이토는 '고려청자 장물아비'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고려청자 수집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저자는 "고려자기 수집 취미는 수요와 공급 논리에 의해 가격 상승을 불러왔고, 이는 경제력 격차에 따른 진입 장벽을 만들었다"며 "이왕가박물관이 공식적으로 수집하면서 가치가 급상승해 중산층이 소유할 수 없는 초고가 미술품이 됐다"고 설명한다.

이어 "서울에 일본인이 차린 고려자기 골동상점이 처음 등장한 때가 1906년인데 불과 20여년 만에 대중적 찬탄의 대상이 됐다"며 "1922년 설립된 미술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고려청자는 경매에 나오기도 전에 다 팔렸다"고 강조한다.

일제강점기 고려청자를 사고 싶지만 너무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는 문화재 애호가들 사이에서 부상한 유물이 바로 조선백자였다.

저자는 그래서 조선백자를 '미술시장의 후발 수요자를 위해 만들어진 대체재'로 본다.

저자는 한때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찾는 이가 없을 정도였던 조선백자가 인기 문화재로 거듭난 데에도 중산층이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전략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백자가 예술품이 된 것은 고려청자와 마찬가지로 예술품의 아우라가 입혀진 덕분"이라며 미술품 수집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조선백자에 '비애의 미'가 있다고 규정해 상품성을 높였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1930년대에는 컬렉터로서 이름을 날리는 한국인 자산가층도 등장했는데, 이들에게는 과시적 욕망과 투자 수익에 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며 "미술시장 규모가 충분히 커지지 않았다면 이러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골동품은 자본주의적 욕망이 투영되면서 상품이 됐고, 이에 따라 제도도 발전했다는 것이 미술시장 역사를 살펴본 저자 생각이다.

그는 여기에 '이식된 근대'라는 왜곡된 시대 상황도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푸른역사. 424쪽. 2만7천900원.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어떻게 한국 대표 유물이 됐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