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일제가 두 번이나 쫓아낸 선교사 매큔

"농사가 천하의 대본(大本)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바입니다.

세대 변천을 따라 각종 기계 발달은 더 말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발달되는 것은 상공업이외다.

전일(前日)에는 모든 사람이 농업을 제일 귀히 여기고 상공업 같은 것은 제일 천히 여겼다가 지금은 도리어 상공업을 귀히 여기고 농업을 천히 여기게 되어서 촌에 사는 농민이라도 도시를 중심하여 일어나는 상공업을 따라 도시로 모여들고 농업을 돌아다도 아니 보게 되니 날로 피폐하여 가는 것은 농업이오. 따라서 농촌이 망하여 가며 농민은 곤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농촌에 남아서 농사하는 사람도 기회만 있으면 도시로 가서 자유노동이나 할까 하여 농촌 백성은 실로 마음 붙이고 살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조선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다 이 같은 형편에 있는 줄 압니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일제가 두 번이나 쫓아낸 선교사 매큔

1929년 6월 12일 선보인 월간지 '농민생활'(農民生活) 창간호 머리말의 한 대목이다.

이 무렵 기독교 단체와 학교를 중심으로 농촌계몽운동 바람이 일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가세했다.

1932∼1933년과 1935∼1936년 동아일보에 각각 연재된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는 이런 시대 배경을 담은 대표적인 소설이다.

창간호 목차를 보면 ▲ 조선 농민의 각성 ▲ 조선 농민의 장래 ▲ 농민 구제책과 기독교 전도 ▲ 땅은 어떻게 생겼나 ▲ 과수병(果樹病)에 대한 관리 ▲ 비료 이야기 ▲ 부업 양계(養鷄)에 대하여 ▲ 덴마크 농촌 소식 등 농민 의식 계몽에서부터 현대식 영농 지식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내용을 담았다.

'농민생활'의 발행인은 다름 아닌 미국 출신 선교사 조지 섀넌 매큔(George Shannon McCune)이다.

그는 일제에 의해 두 차례나 추방당하며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고 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외국인 선교사가 받은 훈장으로는 훈격(3등급)이 가장 높고 시기적으로도 가장 앞선다.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은 그를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으며,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이달 말까지 자료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일제가 두 번이나 쫓아낸 선교사 매큔

매큔은 1873년 12월 15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났다.

한국식 성명은 윤산온(尹山溫)이다.

스코틀랜드계 사람들은 이름 앞에 '맥'(Mac)을 많이 쓰는데 원래는 손자란 뜻이다.

맥아더는 아더의 손자 가문을 일컫는다.

매큔은 앞글자를 뺀 '윤'(尹)을 성으로 삼고 이름은 미들네임 '섀넌'과 비슷한 발음의 '산온'이라고 정했다.

매큔은 미국 파크대와 미주리대를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1905년 아내와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미국 북장로교가 평양에 설립한 미션스쿨 숭실학교에 부임했다가 1909년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학교 교장으로 옮겼다.

그곳 역시 개신교계 중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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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11년 9월 터진 '105인 사건'을 계기로 독립운동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됐다.

일제는 민족지도자들을 잡아넣으려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했다.

그해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한 뒤 돌아오다가 선천역에 내려 지역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했는데, 이 틈을 타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모의했다고 몰아갔다.

이승훈·윤치호·이동휘 등 600여 명을 가두고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 이 가운데 105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구속돼 고문을 당하고 자신도 학생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자 매큔은 경찰 당국에 항의하고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총독 면담을 요청했다.

선천 보성학교 책임을 맡고 있던 부인은 미국 교회에 편지를 보내 불법 구금, 고문,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했다.

1919년 3·1운동의 물결이 선천으로도 번지자 매큔은 만세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집에 피신시키고 일본 경찰의 가택 수색을 거부했다.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사실을 알리는 기고문을 작성한 뒤 우편 검열을 피해 인편으로 미국 시카고에서 발간되는 잡지사 '콘티넨트'(The Continent)로 보내 실었다.

3·1운동의 전주곡 격인 2·8 독립선언서 영어 번역문을 교정하기도 했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일제가 두 번이나 쫓아낸 선교사 매큔

이를 계기로 일제 감시의 눈초리는 매서워졌다.

압력을 견디다 못한 매큔은 1921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7년 뒤 재입국했다.

새뮤얼 오스틴 모페트 박사가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다.

숭실전문학교는 1928년 부설 농업강습소를 세운 데 이어 1931년 정식으로 농업과를 개설했다.

그 사이 '농민생활'도 창간됐다.

일제는 1930년대 들어 동화(同化)정책의 하나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25년부터 공사립 각급학교에 실시했다가 기독교계 학교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사립학교는 일단 제외됐으나 1931년 만주사변과 함께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며 모든 학교에 의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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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큔이 학교 설립 목적에 맞지 않는다며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하자 야스타케 다다오(安武直夫) 평남지사가 도청으로 불러 최후통첩을 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교장 인가를 취소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와 양심상 할 수 없을뿐더러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1936년 1월 18일 서면 답변했다.

교장 자격이 박탈됐고 그해 3월 미국으로 추방됐다.

그가 한국을 떠날 때 평양 시민 수천 명이 눈물로 전송했다.

숭실학교는 그 뒤로도 신사참배를 못 하겠다고 버티다가 1938년 자진 폐교했다.

신앙의 자유를 침해한 신사참배 강요는 일제 식민통치의 씻을 수 없는 죄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많은 학교와 교회가 문을 닫았고 순교자도 낳았다.

매큔은 그 뒤로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일제의 비인도적 식민통치를 폭로하는 기고와 강연에 나서고 북미한인학생회 자문위원을 맡는 등 독립운동을 돕다가 1941년 12월 4일 시카고 장로회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일제가 두 번이나 쫓아낸 선교사 매큔

광복 75주년을 맞도록 대한민국은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국론 대립과 한일 갈등을 거듭하고 있다.

신사참배 수용과 거부로 갈린 개신교 교단은 분열의 상처를 극복하기는 커녕 교회 권력을 놓고 갈가리 찢어진 상태다.

100년 전 이 땅에 공의(公義)와 배려의 씨앗을 뿌리려고 힘쓴 매큔 선교사가 만일 이 모습을 본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두렵고 부끄럽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일제가 두 번이나 쫓아낸 선교사 매큔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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