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도립 여성 중고교 최고령 졸업자 윤정순 할머니 "100살까지 배우고파"
84세에 고교 졸업장 손에 쥔 '왕언니'…"감사하고 기적같은 일"
"일찍 학교에 다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아쉽지만 졸업하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 감사해요.

"
올해 84세인 윤정순 할머니는 31일 전북도립 여성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54명의 졸업생 중 가장 나이가 많다.

학교에서 '왕언니'로 불린다는 윤 할머니는 이날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던 할머니를 지지해준 남편과 자식들, 학교 선생님들, 건강한 다리까지. 3박자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늦깎이 공부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윤 할머니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입학을 결정했던 건 배움에 대한 열망 그리고 진취적인 성격 덕분이었다.

윤 할머니는 1940년대에 상업 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기차역에서 교복과 교과서 등이 든 보따리를 도둑맞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 어르신들이 배울 만큼 배웠으니 학교를 그만 다니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여자는 요리 잘하고 바느질 잘하면 된다고 그랬죠."
윤 할머니는 보따리를 도둑맞던 그 날이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했다.

"보따리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교복과 교과서를 새로 사지 않아도 괜찮았다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평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
아쉬움은 전주에 도립여성 중고등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새로운 꿈으로 바뀌었다.

"완주에서 전주로 올 때마다 괜히 학교 주변을 지나가고 그랬어요.

애들 키우고 일하느라 낮에는 바쁘니까 야간 수업은 없나 주변에 물어보고 그랬죠."
고민만 하던 윤 할머니는 5남매가 자리를 잡고 식도암을 앓던 남편의 몸이 호전되자 용기가 났다.

"지금 아니면 절대 못 배우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혼자 무작정 학교에 갔어요.

"
호기롭게 학교로 갔지만 쉽게 교무실 문을 열지 못했다.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선생님의 눈에 띄어 상담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윤 할머니는 "남편이 완치되지 않았는데 학교에 다녀도 되는 걸까"하는 마음에 조심히 할아버지에게 마음을 털어놓았고, 할아버지는 그런 윤 할머니를 적극적으로 응원했다.

"바깥양반은 학교 다녀오면 마치 초등학생 학부모처럼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뭐 배웠는지 물어보고는 했어요.

응원도 많이 해줬죠."
평생의 동반자이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중학교 2학년이던 봄, 곁을 떠났다.

그때가 할머니는 학교에 다니는 6년간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윤 할머니는 "그 양반이 떠나고 집이 얼마나 크게 느껴지던지. 그래도 눈을 뜨면 학교에 와서 '왕언니'라며 따르는 동생들이 있어서 어찌어찌 지금까지 왔어요"라며 눈물을 훔쳤다.

84세에 고교 졸업장 손에 쥔 '왕언니'…"감사하고 기적같은 일"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던 일주일을 빼고는 6년간 결석 한 번 하지 않았던 할머니는 이제 배움의 열정을 주변 복지관에서 미술을 배우며 이어갈 예정이다.

미술동아리에서 배운 그림이 재밌고, 선생님에게 칭찬도 받을 만큼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뒤돌아서면 수업 내용을 자꾸 잊어버려서 조금 더 빨리 학교에 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그래도 얼마나 좋아요.

배움 덕분에 대화할 때 상대를 더 이해를 잘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이래서 100살까지 배워야 한다고 느꼈어요.

정말 감사해요.

"
배움의 시기를 놓친 성인 여성들을 위해 전북도가 1998년 설립한 이 학교는 올해까지 도두 1천4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