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까지 손댔다가 마음 잡고 탈북민 직업상담…"정착 경험 공유"
"한국은 '노력의 대가' 있는 사회…탈북민 콤플렉스 극복해야"
[탈북 후] 동료들 정착 도우며 '시 쓰는 공무원' 김혜성씨
"사람은 저마다/ 돌아갈 고향이 있다.

"
한국 정착 12년 차의 탈북민이자 시인인 김혜성(45)씨의 등단작 '고향길'의 첫 문장이다.

설과 추석 같은 명절이 돌아오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진다.

김씨의 고향은 백두산 바로 아래 자리 잡고 있고 최근에는 감자로 유명해진 양강도 대홍단.
진달래와 철쭉이 가득 피는 고향은 아름다웠지만, 행복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모님이 연달아 눈을 감은 데 이어 오빠와 남동생까지 군대에 가자 25살에 혼자가 됐다.

그때 누군가 '중국에서 한 달만 고사리를 꺾어서 팔면 돈을 엄청 많이 벌 수 있다'고 속삭였다.

"저는 그분이 다시 데리러 올 줄 알고 고사리를 정말 열심히 꺾었거든요.

우리 집에서 밥도 얻어먹던 분이 설마 나를 팔리라곤…."
한 달이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고향. 그러나 팔리는 줄도 모르고 도착한 중국에서 7년이란 세월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중국을 떠나 가까스로 한국에 도착한 것은 2009년. 대구에서 시작한 한국살이는 어렵고 낯설었다.

고향을 떠나면서 겪은 고난과 상실은 통통 튀던 성격마저 어둡게 만들었고, 중국에서 낳은 하나뿐인 딸도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4년 만에 새 출발을 위해 서울행을 택했지만 삶은 기대한 것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일자리조차 얻을 수 없었다.

"서류를 보고 받겠다고 했다가, 통화하면 '어디 사람이에요?'라고 물어요.

북한이라 그러면 '미안합니다'하고 거절하는 거죠."
결국 다단계에까지 손을 뻗었고, 빚에 허덕이는 1년간의 방황 끝에야 공부만이 살길임을 깨달았다.

[탈북 후] 동료들 정착 도우며 '시 쓰는 공무원' 김혜성씨
곧장 상담을 비롯한 각종 자격증 공부에 뛰어들었고, 계약직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작년까지 공공기관에서 주로 탈북민 상담 업무를 하다 올해부터 양천구청 민원여권과에서 일하고 있다.

그간 김씨의 도움으로 계약직 공무원 취업에 성공한 탈북민만 7명. 지금도 퇴근 후 봉사활동으로 하는 탈북민 직업 상담은 이제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저도 실패라는 걸 맛봤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저도 해봤기 때문에 상담을 통해 제 경험들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요.

"
김씨는 탈북민을 향한 한국 사회의 선입견이 아픈 부분이라며, '탈북민이라서 잘 모를 것이다'라고 넘겨짚는 대신 한 번 목숨을 내놓은 사람만이 지닌 대담함과 용기를 봐달라고 당부했다.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모른 채 총알이 빗발치는 어두운 숲속을 내달린 것처럼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기억을 모든 탈북민은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다.

또 한국 사회에 정착하려면 '북한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한다며 자신이 바로 탈북민의 대표라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단 각오하고 북한을 떠났다면, 일생 스스로 짊어져야 할 짐이에요.

그걸 이겨내야만 해요.

"
정착이 쉽지 않지만, 한국은 노력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는 사회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과거 수필로 북한의 유명 아마추어 문학 공모전인 '6.4 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일찍이 글짓기에 재능을 보였다.

문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어릴 때부터 앓은 류머티즘으로 140㎝가 되기도 전에 멈춘 키가 발목을 잡았다.

원했던 대학은 신체 조건을 까다롭게 봤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내가 키가 작다고 해서, 가정이 가난하다고 해서 내 노력이 빛이 나지 않는 게 아니잖아요.

"
[탈북 후] 동료들 정착 도우며 '시 쓰는 공무원' 김혜성씨
탈북 후 하나원에서 만난 한 교수는 김씨의 수필을 읽고 시를 쓰면 더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16년에는 정식으로 등단까지 했다.

앞으로 틈틈이 쓴 시 30∼40편을 묶어 시집을 출판할 계획이다.

자서전 출판도 꼭 이루고 싶은 꿈이다.

누구에게도 동정받지 않을 만큼 성공적인 정착을 이뤘을 때 세상에 내놓고 싶다고 한다.

김씨는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힘든 상황에 부닥친 탈북민이 많다고 했다.

앞으로도 상담을 통해 그들의 정착을 도울 예정이다.

정규직 공무원이 되기 위한 노력도 진행 중이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2022년 함께 정규직 공무원이 되기로 약속했다.

북한에 남아 있는 오빠와 남동생을 떠올리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김씨.
"언젠가 만날 수 있다면 오빠나 동생만큼, 그에 못지않게 열심히 살았다고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해."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