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만찬] "면접 4수 끝 법조인 꿈 이뤄…98개 버킷리스트 다 달성해야죠"
1977년 10월, 군부 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됐다. 당시 서울대 법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현 학생의 마음도 들끓었다. 김 군은 대형 강의실 단상 위에 올라갔다. "학교 밖으로 나가자"는 그의 말에 학생들이 동요했고, 그를 포함한 500명의 학생들이 관악경찰서로 연행됐다. 반정부 불법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유기정학을 받았고 그의 삶에 ‘떳떳한 전과’ 한 줄을 남겼다.

김 군은 유기정학 처분을 받고도 태연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게 더 이상했던 당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당연한 행동’이 김 군의 발목을 잡았다. 두 번의 행정고시 면접과 한 번의 사법고시 면접에서 모두 낙방한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전과’였다. 노력과 열정으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 그는 좌절감에 빠졌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받아주지 않는 이상 외국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SK 고등교육장학재단의 지원으로 그는 미국 유학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명문으로 손꼽히는 코넬대학과 워싱턴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끝내 법조인의 꿈을 이뤄냈다.

단지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는 것만으로 국내에서 외면당해야만 했던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그를 다시 일어서게 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세 번의 낙방, 좌절감이 컸을 듯하다.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1980년에 행정고시 필기시험에 합격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다. 탈락사유가 부적합한 국가관이었다. 충격으로 1년간 방황하다 그 다음해에 다시 한 번 면접을 봤는데, 결과는 똑같았다. 해도 안 된다는 절망감 때문에 힘들었지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법학도니까 사법시험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1년간 열심히 준비했다. 1982년 사법시험에 1‧2차를 동시 합격했다. 그 당시는 시험은 보는대로 다 합격이었다(웃음). 그런데 역시나 면접에서 또 낙방했다. 학적부에 적혀있는 ‘유기정학’에 대해 면접관이 계속 물어봤다. 1980‧81‧82년까지 총 세 번을 떨어졌다.”

▶미국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됐나.
“우리나라에서 희망을 찾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비유학생 면접에서도 낙방하고나니 그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던 중 당시 SK에서 ‘한국고등교육장학재단’을 운영한다는 걸 알게 됐다. 1년에 10명을 소수정예로 선발하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선발됐다. 면접에서도 유기정학 처분에 대해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웃어넘겼다. 재단 지원으로 미국으로 가 코넬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잇따른 면접 낙방 끝에 사법시험 합격, 의미가 남달랐을 듯하다.
“미국 유학 도중 비행기값을 과감히 투자해서 1983년 가을에 한 번 더 사법시험 면접을 봤다. 많은 도움을 준 분이 송상현 교수님이다. 추천서를 무려 다섯 장이나 써주셨고, 당시 군부 정권 세력을 직접 찾아가 설득까지 하셨다. ‘당신네 정권에 정당성이 없다, 이 젊은이의 꿈을 짓밟고 있는 것’이라고. 결국 이 부분이 받아들여져 25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게 됐다. 어렵게 꿈을 이루게되니 더 없이 소중했다. 마음 고생이 심했던 지난 날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웃음).”

▶유학 생활은 어땠나.
“사법시험 합격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84년까지 코넬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수업방식은 토론식으로 진행됐다. 기존 한국에서 해왔던 수업과 차이도 있고 무엇보다 영어가 잘 안 들려서 힘들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인터프리테이션(Interpretation·해석)'이란 단어가 잘 안들려서 매번 ’토피테이션‘이라고 잘못 알아들었다.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창피했다. 언어 장벽과 수업 구성의 차이가 있다보니 처음엔 많이 힘들었다. 코넬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워싱턴 대학에서 1년 반에 걸쳐 박사과정(PHD in Law)을 끝냈다. 그래도 초반 어려움을 이겨내니 점차 미국 생활에 적응해갔다.”

▶변호사로 진로를 정한 계기는.
“맨 처음 미국에 갈 때는 한국으로 돌아와 법학교수를 할 생각이었다. 당시 시애틀의 명문 로펌 ‘보글 앤 게이츠’에서 3개월 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때 미국변호사들은 의뢰인을 위해 정말 치열하게 일한다는 걸 느꼈다. 본인보다 의뢰인의 상황을 더 우위에 놓았다. 의뢰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던지면서 일하더라. 점심에 샌드위치를 먹는 와중에도 토론하는 열정적인 모습에 반했다. 나도 저렇게 치열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어땠나.
“돌아와서는 로펌 ‘화우’에 취직했다. 당시 변호사 수도 적었고 해상전문변호사를 표방하는 이가 많지 않아 사건이 많이 들어왔다. 시작한지 1년 만에 파트너 자리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로펌은 파트너와 고용변호사로 나뉘는데, 고용변호사는 월급을 받지만 파트너는 지분을 배당받는 동업자 개념이다. 대표에게 그 말을 전하자 단칼에 거절하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패기였다(웃음). 이후 나와서 직접 개업하게 됐다. 아버지를 닮아 어디든 부딪혀보는 열정적인 성격이다. 고분고분한 월급쟁이와는 잘 맞지 않았다(웃음).”

▶해상법을 전공한 이유는.
“바다를 좋아했던 아버지 영향이 컸다. 10대 시절 아버지와 만리포해수욕장으로 바캉스도 자주 떠났다. 천막을 치고 바다를 보면서 피카소, 베토벤, 나폴레옹 등 다양한 분야의 얘기를 해주셨다. 어릴 때부터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자상하고 낭만적인 모습을 늘 존경해왔다. 그러다 1981년에 서울대 대학원 진학 당시, 해상법을 전공한 송상현 교수님을 만났다. 국제법과 행정법 두 가지를 놓고 고민 중이었는데 해상법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교수님이 젊고 재밌는 분이라 개인적으로 많이 따랐다. 해상법은 바다와 관련된 분야이지 않나. 아버지와의 추억도 떠오르고 이런 법도 있었나 싶어 확 끌리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인 것 같다(웃음).”

▶가장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98개의 버킷리스트가 있다. 그 중 법안 12개 발의, 징벌적 손해배상법 통과 등 20개를 달성했다. 아직 이루지 못한 리스트 가운데 첫째, 법무담당관 관련 내용을 이루고 싶다. 현재 중앙부서와 지방자치단체에 법률가가 적다. 결과적으로 법치 행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고 조례 체계가 잘 맞지 않다. 법조인이 대거 투입 돼 국가소송 승소율을 높이고 조례를 제대로 구성하고 싶다. 두번째는 준법지원인 확산이다. 기업이 투명하게 움직여야 선량한 국민들이 믿고 투자할 수 있다. 그걸 감시하는 역할이 준법지원인이다. 제안한 법안이 2012년에 받아들여져서 준법지원인 제도가 만들어졌는데, 기업은 반대가 심하다. 현재 ‘자산 5000억원 이상인 300여개 기업’에만 도입하자고 절충한 상태다. 이를 모든 상장기업으로 넓히는게 목표다.”

▶열정이 남다르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옳지 못한 행위에 대해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전과자가 됐다. 나라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좌절감과 배신감이 컸고, 방황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잡아줬던 나만의 ‘중심축’이 없었다면 분명 지금도 힘들어했을 것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본인을 흔들더라도, 절대 휘청이지 않게끔 자신만의 축을 꼭 갖기를 바란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1년 뒤, 5년 뒤, 10년 뒤의 내 모습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잡앤조이=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