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완 경주박물관 연구사 분석 "1943년 중수 공사 기록"
"3층 몸돌 사리구멍서 발견됐을 가능성"
경주 고선사지에서 찾은 얇은 부식 함석판 정체는
경주 고선사지(高仙寺址)는 삼국시대에 창건했다고 전하는 절터다.

1970년대 초반 덕동댐을 건설하면서 사라졌는데, 당시에 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경주박물관이 소장한 고선사지 출토품 중에는 중앙부가 심하게 부식한 얇은 사각형 함석판이 있다.

가로 21.2㎝, 세로 18㎝, 두께 0.5㎜인 이 유물은 1977년 고선사지 출토품이 박물관으로 넘어올 때 함께 인계됐는데, 조사 보고서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동안 용도와 가치를 알지 못했던 함석판의 정체는 무엇일까.

임재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5일 "고선사지에서 나온 사각형 함석판은 1943년 삼층석탑을 중수한 명령권자와 공사 담당자를 기록한 일종의 중수기로, 일제강점기 문화재 수리 체계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밝혔다.

임 연구사는 경주박물관이 펴내는 학술지 '신라문물연구' 최신호에 실은 논문에서 "표면 부식이 매우 심하지만, 앞면에서는 글씨가 일부 확인된다"며 명문(銘文·금석에 새긴 글자)은 세로쓰기했고 여섯 줄이라고 설명했다.

경주 고선사지에서 찾은 얇은 부식 함석판 정체는
명문은 오른쪽 첫 줄부터 다섯 줄까지 양식이 동일하다.

'영'(令) 아래에 사람 이름으로 추정되는 글씨 3∼4자가 있다.

여섯 번째 줄에는 '공사 수○자 대전우일'(工事 受○者 大田友一)이라고 썼다.

임 연구사는 "전체적으로는 공사와 관련된 명령권자와 담당자를 명기했다"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명령권자 직위가 낮아지는 것처럼 보이며, 마지막으로 공사 담당자를 적었다"고 했다.

함석판에 나오는 인물 중 유일하게 이름이 확실한 '대전우일'은 경주 노서리에 거주한 일본인 오타 유이치라고 임 연구사는 주장했다.

그는 "오타 유이치는 고선사지 삼층석탑 연혁을 추적한 논문에서도 확인된다"며 "1943년 3월 1일부터 30일까지 중수 공사를 맡았다"고 덧붙였다.

경주 고선사지에서 찾은 얇은 부식 함석판 정체는
나머지 인물은 오른쪽부터 '○전량○'(○田亮○), '○광교○'(○光敎○), '○○신삼'(○○信三), '○○○○', '○정성'(○靖筬)이다.

임 연구사는 첫 인물은 일제강점기 유명한 고고학자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두 번째 사람은 1940년대 초반에 조선총독부박물관장을 지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세 번째 인물은 한국과 일본 건축사를 비교한 스기야마 노부조(杉山信三)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는 "스기야마 노부조는 오타 유이치와 함께 고선사지 삼층석탑 준공증명서에 등장해 의심할 여지가 없다"며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보물로 지정됐기 때문에 수리 작업에 후지타 료사쿠가 직접 관여한 듯하다"고 추측했다.

이어 "네 번째 인물과 다섯 번째 인물은 누구인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보고 체계상 경상북도 또는 경주에 속한 조선총독부 직원이었을 것"이라며 "함석판을 통해 문화재 수리가 매우 세밀한 단계를 거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 연구사는 그러면서 "명문 내용이 중수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함석판은 삼층 탑신석 상단에 있는 네모난 사리공(舍利孔·사리를 넣는 구멍)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탑을 옮길 때 함석판이 버려지지 않은 이유도 출토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