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만찬] 양진옥 굿네이버스 회장 "진로 고민, 혼자했다면 답 찾을 수 없었을 것"
1991년 한국이웃사랑회로 출발한 굿네이버스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는 토종 비정부기구(NGO)다. 2016년 취임한 양진옥 회장은 굿네이버스를 가장 잘 아는 인물로 꼽힌다. 1995년 공채 1기로 입사해 20년 이상 근무하며 모금, 기획 등 다양한 부서를 두루 거쳤다. 지난해 9월에는 한 주간지에서 조사한 ‘가장 영향력 있는 NGO 지도자’ 7위로 선정됐다.

▶‘가장 영향력 있는 NGO 지도자’ 7위로 선정됐다. 비결을 꼽는다면.
“굿네이버스를 창립한 이일하 이사장은 항상 순위권에 들었다. 처음으로 굿네이버스에서 두 명이나 순위권에 들었다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다. 굿네이버스는 내부에서 훈련받고 경험이 쌓인 전문 인력을 키우고 있다. 나는 공채 출신이기 때문에 이러한 굿네이버스의 창립정신, 조직문화가 몸에 밴 사람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 같다. 부담도, 책임감도 크다.”

▶굿네이버스 공채 1기 출신이라 들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긴 했지만 4학년 1학기 때 일반 기업에 지원했다. 그런데 입사하게 되면 일하게 될 자리가 내키지 않았다. 여자 직원이 결혼을 해 퇴사한 공석을 채우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회사 문화 자체가 결혼하면 그만두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꾸준히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진로를 다시 고민해 공무원이 되거나 공부를 계속하거나 사회복지 분야로 나가는 것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굿네이버스(당시 한국이웃사랑회) 공채 공고를 보게 됐다. 일반 사회복지기관과 달라 눈에 띄었다. 구호개발을 하고 제3세계 아동 사업을 하는 일 등이 생소했다. 자원 개발, 홍보, 모금, 사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새로웠다.”

▶근무하며 느낀 것은.
“NGO라고 하면 대부분 복지관, 보육원으로 인식을 많이 한다. 정부 재원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굿네이버스는 인식개선에 주안점을 둔다. 이를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기획하고 있다. 예전에는 아동학대가 문제라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지 못했다. 내 자식을 부모 마음대로 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는 인식이었다. 굿네이버스는 아동학대 실태조사를 해 그것이 범죄라는 것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캠페인을 통해 얻은 공감의 숫자를 갖고 정부의 문을 두드렸고, 사각지대 아동을 발굴해 캠페인을 진행하고 상담 센터도 만들었다. 1998년에는 일명 ‘영훈이 사건’이라는 아동학대 사실을 보도하고 아이를 구출했다. 2000년에는 법 개정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언론, 방송을 통해 이슈화 시키고 인식 개선을 하는 것이 NGO의 역할이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예전에 하고 싶어 하던 언론 홍보 일을 이곳에서 더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복지를 전공했는데 다른 진로를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언론홍보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해당 전공으로 대학 전기모집에 지원했는데 탈락했다. 후기 모집에서도 또 지원을 하자니 경쟁률이 너무 높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대학생이던 언니, 오빠가 조언을 많이 해줬다. ‘전공이 정해진다고 진로까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선택의 폭을 넓히라고 했다. 고민하다가 어문계열보다는 사회과학 분야가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고, 사회복지가 실천적 학문이고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결정했다.”

▶전공은 잘 맞았는지.
“입학하고 얼마간은 힘들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더라. 실습보다는 정책을 공부하는 수업이 많았다. 선배들의 진로도 공무원, 행정고시, 정책 관련 일을 하는 식이었다. 그러던 중 수화 동아리에 가입하게 됐고, 그곳에서 대학생활의 재미를 찾았다. 다양한 활동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동아리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나.
“간단한 영어 회화를 배우듯 수화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일일찻집도 열고 공연도 하고. 한 번은 자원봉사를 갔는데 그곳에서 공대 남학생이 열심히 활동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하면서도 청각장애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그 남학생은 스스럼없이 다가가 관계를 잘 맺고 있더라. 굉장히 부끄러웠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준비가 돼야 하는구나를 느꼈다. 그걸 계기로 더 열심히 활동하게 됐고, 2학년 때는 동아리 회장까지 맡았다. 특히 다양한 수화 공연 등을 기획하는 일이 굉장히 즐거웠다.”

▶어릴 적에는 어떤 학생이었나.
“제주도에 살았는데 섬 안에서도 시골, 도시가 있다. 초등학교 때 도시에서 시골로, 다시 시골에서 도시로 두 번 전학을 했다. 6학년 2학기 때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왔는데 완전히 기가 눌렸다. ‘시골에서는 잘 나갔는데 여기 오니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도 얼마 안 남아 친구들과 친해지기도 힘들었다. 원래 성격이 활발한 편인데 그때는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중학교에 가서는 다시 원래 성격대로 활발히 활동했다. 학생회장도 역임하고 고등학교 때까지 합창단 단장을 했다. 예체능을 좋아해 한국무용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우고 육상 선수도 했다.”

▶적극적인 성격이었나 보다.
“학생회장, 합창단장을 했다고 하면 나서는 것을 좋아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먼저 앞에 나서는 편은 아니었다. 대신 시키는 것은 빼지 않았고,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가지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학급에서도 혼자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을 경계했다. 전학을 다니며 스스로 움츠러든 경험이 있기 때문에 소외되는 아이들이 생기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친구들과 더 어울리게 됐고, 덕분에 다양한 성향의 친구들을 두루 사귀었다.”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는지.
“지금처럼 학원을 다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시간이 많았다. 지식이나 학습이 모자랐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배운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제주도라는 좁은 지역사회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정서적으로 좋은 영향을 받았다. 공부는 고3때부터 열심히 했다.”

▶어린 시절 좋은 영향을 준 멘토가 있는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기억에 난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소속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많이 제안하셨다. 급훈도 만들고, 학급 신문도 만들고, 급가도 만들었다. 학급을 운영하는데 모든 친구들이 골고루 탄탄하게 어우러지는 경험을 했다. 그때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것저것 관심, 호기심이 많고 가진 재능도 많은 것이 장점이지만 그래서 고등학교 때 진로를 정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얘길 해주신 적이 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래서 내가 진로 고민을 오래 했었나 싶더라.”

▶요즘 청년들도 진로 고민이 많다. 그런데 대부분 공무원, 대기업만 선택한다. 너무 한쪽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고민이라는 것은 길을 개척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을 할까 보다 무엇을 위해 일을 할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또한 내가 뭘 잘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등 나에 대한 파악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 고민을 혼자 하면 안 된다. 나는 사람들에게 고민을 많이 이야기하고 또 다른 사람의 고민도 들어줬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순간순간 자기도 모르게 깨닫는 것이 있다. 여러 사람과 만나면서 고민도 나누고 나를 표현하기도 해야 한다. 나눔이란 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다. 주변에 고민하는 친구에게 먼저 힘내라고 얘기하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것이 나눔의 시작이다. 요즘 세상이 삭막한데 내가 나눌 수 있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걸 잊지 말고 하길 바란다.”

잡앤조이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