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서 체모 분석해 회신…국과수는 전혀 다른 수치 기재
엉뚱한 체모가 범인의 것으로 둔갑한 듯…검찰 "진상 철저히 규명"


검찰이 '진범 논란'이 일고 있는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에 대한 직접 조사에 나선 가운데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 조작 의혹이 사실로 확인됐다.

이는 지난 수개월간의 경찰 수사 단계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내용으로, 검찰이 법원에 재심 의견을 제출하기 위해 과거 경찰의 수사기록 등을 받아 검토하는 과정에서 밝혀낸 것이다.
검찰, 이춘재 8차사건 국과수 감정 조작 의혹 사실로 확인
이번 검찰 조사에서 국과수의 감정서 조작 등이 종국적으로 사실로 드러날 경우 현대 과학수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국과수 감정 결과를 유·무죄 판단의 강력한 근거로 내세워 온 사법체계의 근간까지도 뒤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춘재 8차 사건을 직접 조사하는 수원지검 형사6부(전준철 부장검사)는 재심청구인인 윤모(52) 씨를 당시 범인으로 최초 지목하는 데에 결정적 증거로 사용된 국과수 감정서가 허위로 조작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

검찰은 "체모에 대한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체모 등에 포함된 중금속 성분을 분석하는 기법) 분석을 실제로 실시한 한국원자력연구원 감정 결과와 국과수의 감정서 내용은 비교 대상 시료 및 수치 등이 전혀 다르다"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국과수가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수많은 체모의 중금속 성분 분석을 의뢰해 감정 결과를 회신한 뒤, 윤 씨의 체모 분석 결과와 비슷한 체모를 범인의 것으로 조작한 것으로 보고 사실관계를 확인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당시 경찰도 이 같은 조작 과정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하고, 이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고 있다.

앞서 윤 씨의 재심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다산은 이춘재 8차 사건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체모에 대한 분석 결과가 시기별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내용이 담긴 의견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이춘재 8차 사건 당시 경찰은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모(당시 13세) 양의 집에서 박 양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되자 윤 씨를 포함해 여러 수사 대상자들의 체모를 건네받아 검사하는 등 수사를 벌였다.

이어 이듬해 7월 윤 씨를 범인으로 특정해 검거하면서 체모의 중금속 성분을 분석한 결과를 핵심 증거로 내세웠다.
검찰, 이춘재 8차사건 국과수 감정 조작 의혹 사실로 확인
다산 측은 이춘재 8차 사건 이후 윤 씨가 경찰에 연행되기 전·후 시점에서의 범인 체모 분석 결과를 볼 때 감정서 조작이 강하게 의심된다고 밝혔다.

다산이 공개한 수사기록에 따르면 범인 체모 내 여러 성분의 분석 수치가 이들 시점 사이 크게는 16배 넘게 차이가 난다.

다산은 지난 4일 검찰에 낸 변호인 의견서를 통해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의 감정 결과가 이렇게 차이가 큰 이유는 두 체모가 동일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윤 씨가 연행되기 전에는 (국과수가) 16가지의 성분을 추출해 분석했는데, 유죄의 증거가 된 감정 결과표에는 4개의 성분이 빠져 있다"며 "40% 편차 내에서 일치하는 성분의 수를 늘리기 위한 의도로 일부 검사 결과를 의도적으로 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라고 밝혔다.

다산과 함께 윤 씨 재심을 돕는 박준영 변호사는 "윤 씨가 연행되기 전이든 후든 똑같이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 체모로 감정을 했다면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느냐"며 "어떤 체모가 어떤 감정에 사용됐는지도 확인되지 않아 (조작) 의심이 든다"고 주장했다.
검찰, 이춘재 8차사건 국과수 감정 조작 의혹 사실로 확인
변호인 의견을 검토한 검찰은 국과수의 감정 과정에 실제로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아직 검찰 조사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국과수의 감정 결과 조작과 경찰의 조작 과정 가담 등이 종국적으로 사실로 드러날 경우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검찰 관계자는 "향후 검찰은 누가 어떠한 경위로 국과수 감정서를 조작하였는지 등 모든 진상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규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