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규칙' 효력 무력화…임금피크제만의 문제 아니다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갈등과 혼란은 국회가 2013년 민간 기업의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부터 예고됐다. 임금피크제 도입을 노사 자율에 맡긴 탓이다. 근속 연수가 길수록 급여도 높아지는 연공서열형 임금체계여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크게 늘어나지만 연장된 정년 동안 임금을 줄이자는 데 쉽게 동의할 근로자와 노조는 없다. 정부가 인건비를 통제하는 공기업은 임금피크제를 활발하게 도입했지만 이를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 10월 파업 직전까지 갔던 서울지하철 노조가 제기한 핵심 쟁점의 하나도 임금피크제였다.

5일 나온 대법원 판결의 요지는 ‘취업규칙을 변경할 때 노조 동의에 더해 개별 근로자 동의까지 있어야만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판결의 파장은 임금피크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은 취업규칙에 임금, 각종 수당, 근로시간, 휴일, 휴가, 식비 등 복리후생 등 근로계약 관계에 필요한 사실상 모든 근로조건을 담도록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개별 근로자와 맺는 근로계약서에 계약기간, 직위, 급여 등 필요 최소한만 담고 나머지 대부분은 취업규칙에 넣는다. 관련법상 취업규칙을 변경하려면 노조 또는 근로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불이익 변경 때는 반드시 동의를 얻어야 한다. ‘집단적 동의 방식’이라 불리는 이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그 부분은 무효가 된다.

대법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법정 절차인 집단적 동의를 거쳤더라도 개별 근로자 동의까지 얻지 않았다면 무효라고 봤다. 노동법 전문가들이 비판하는 대목이다. 노사 합의에 기초한 취업규칙의 법적 토대까지 흔들었다는 이유에서다. 노동계 일각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노조 동의를 얻어 변경한 취업규칙을 근로자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고, 근로조건을 협상·결정하는 과정에서 노조의 대표성이 취약해질 수 있어서다.

이번 판결은 2017년 12월의 판결과 법리는 같다. 대법원은 해양구조물 조립업체 근로자가 취업규칙 변경으로 만근수당을 받지 못했다며 제기한 사건에서 ‘개별 근로계약에 정한 유리한 조건은 취업규칙에 우선한다’고 판결했다. 같은 법리지만 이번 판결은 파장이 훨씬 크다. 임금피크제, 정년 연장 문제와 연계되면서 고령화사회 대비라는 국가적 정책과제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2025년까지 65세로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71.9%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현대자동차 같은 주요 대기업 노사의 금년도 임단협 교섭과정에서 정년 연장은 핵심 쟁점의 하나였다. 정부도 정년 연장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임금피크제를 포함한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보완책이 병행되지 않은 정년 연장은 후유증이 크다. 청년 ‘취업절벽’이 대표적이다. 보완책이 병행돼야 하지만 개별 근로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사실상 공염불인 상황이 됐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노동시장 변화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