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63호분 뚜껑돌 2개 이동
정인태 연구사 "도굴 안된 무덤, 공기 달라"
늦가을 햇빛, 영면에 든 비화가야 지배자 깨웠다
멀리 낮은 구름 아래로 산이 첩첩하게 보이고, 가까이는 창녕 시가지가 시야에 잡혔다.

발아래로는 5∼6세기에 조성한 비화가야 집단 묘역이 펼쳐졌다.

아름답고 따스한 풍광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하지만 28일 오전 사람들의 시선은 정반대 쪽으로 향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노출된 고분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크레인 한 대가 섰다.

"개석(뚜껑돌) 7매가 있습니다.

석곽보다 넓습니다.

무게가 3∼4t은 될 듯합니다.

"
마이크를 잡은 정인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설명했다.

크레인은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을 1천500년 넘게 덮은 육중한 뚜껑돌에 맨 줄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다소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뚜껑돌은 이내 안전한 곳에 놓였다.

늦가을 햇빛, 영면에 든 비화가야 지배자 깨웠다
그때 늦가을 햇빛이 무덤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영면에 든 무덤 주인공이 깨어난 순간이었다.

5세기 중반 무렵 창녕을 거점으로 삼은 비화가야 사람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묻었을 토기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점토 덩어리와 철제 유물도 군데군데 보였다.

이날 공개된 무덤은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63호분. 이곳 무덤은 대부분 도굴됐는데, 63호분은 인접한 39호분과 봉토를 공유한 덕분에 피해를 보지 않았다.

양숙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39호분과 63호분 피장자는 친연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무덤 2개가 함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털어놨다.

재질이 화강암인 뚜껑돌은 실제 무게가 각각 2.8t과 3.8t에 달했다.

뚜껑돌 사이는 깬돌로 메우고, 그 위에 점질토를 덮어 밀봉했다.

정 연구사는 "함안이나 고령에서는 보통 매장주체부를 얇고 무른 돌로 덮어서 무너져 내린 경우가 적지 않다"며 "창녕에서는 63호분처럼 큰 석재를 뚜껑돌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뚜껑돌은 인근 화왕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떻게 옮겼는지는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늦가을 햇빛, 영면에 든 비화가야 지배자 깨웠다
그는 뚜껑돌과 무덤 남쪽 벽면 등에서 확인된 주칠(朱漆) 흔적에도 주목했다.

정 연구사는 "주칠은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장송 혹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 의미로 보인다"며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나 부산 연산동 고분군에서도 주칠이 발견됐는데, 63호분처럼 잘 나타난 사례는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굽다리접시와 장경호(長頸壺·목이 긴 항아리) 등이 어지럽게 놓인 매장주체부 조사는 이제 시작이다.

유물 양과 종류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날 끌어올리지 않은 뚜껑돌 5개를 존치할지도 결정되지 않았다.

아울러 송현동 15호분처럼 형태가 온전한 인골이 발견될 것인지도 관심을 끈다.

정 연구사는 "흙을 물체질해서 인골 유무를 확인할 계획"이라며 "유물 수습에는 2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을 마주했을 때 기분은 어떨까.

정 연구사는 내부를 봤을 때 "공기가 달랐다"고 했다.

"스산하다고 할까요, 음산하다고 할까요.

보통은 무덤을 발굴할 때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는데, 63호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
늦가을 햇빛, 영면에 든 비화가야 지배자 깨웠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