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박제가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이 가난하다. 지금 갖은 노력을 기울여 전답을 경작하고, 현명한 인재를 기용하며, 상인에게 장사를 허용하고, 장인에게 혜택을 더해 주어 나라 안에서 챙길 이익을 다 거둔다고 해도 오히려 풍족하지 못할까봐 염려한다. 그러면 또 먼 지방에서 나오는 물건을 통상을 거쳐 가져와야 재화가 불어나고 갖가지 쓸 물건이 마련된다.”… “우리는 저들의 기술과 예능을 배우고, 저들의 풍속을 질문함으로써 나라 사람들이 견문을 넓히고, 천하가 얼마나 크고 우물 안 개구리의 처지가 얼마나 부끄러운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일은 세상의 개명을 위한 밑바탕이 되므로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는 데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의 대표적인 저서 <북학의>에서 조선의 교역과 개방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북학의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그는 오늘날의 경제학자보다 더 정확하게 당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박제가의 상업론

병자호란을 겪은 18세기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취급하면서 청나라의 발전된 기술과 문화를 외면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근대화의 세계적 흐름에 당시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런 시기에 박제가는 이미 외국과의 교역을 통한 조선의 부국강병을 외쳤다.

또한, 박제가는 상업 발전을 가장 강하게 주장했다. 북학의에서 그는 “중국 사람은 가난하면 장사를 한다. 비록 장사로 먹고살아도 사람만 현명하다면 훌륭하게 대접받고 살 수 있다. 사대부라고 할지라도 거리낌 없이 시장을 출입하고 물건을 거래한다.” 반면, “조선의 사대부는 굶어 죽을지라도 장사를 하느니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박제가는 이런 사대부들을 비판하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신분질서를 비판했다. 상업을 활성화해 각 지역에 풍부한 물자를 부족한 지역으로 유통시켜 나라 전체의 후생을 높이자고 했다. 애덤 스미스의 뺨을 칠 정도의 탁견이었다. 하지만 당시 집권층은 이를 외면했고, 서구열강들의 침략 속에 이후 조선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한국의 수출 공업화

박제가의 상업·교역에 대한 주장은 196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이 시작돼서야 실현됐다. 당시 필리핀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낮았던 한국은 배고픔에 벗어나기 위해 경제개발이 절실했다.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먼저 경공업을 육성했다. 가발, 섬유 등 돈이 되는 것은 모두 수출해 외화를 벌었다. 이후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 산업단지를 조성해 수출 중심의 공업화 전략을 시행했다. 도로가 생기자 물자들이 이동했고, 각종 산업이 발달했다. 수출을 통해 한국은 외국의 우수한 기술력을 유치했고,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기업가들이 석유화학·정유·조선·반도체 등 한국의 현재 주력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 바탕에는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여 산업을 고도화하는 수출 공업화전략이 있었다. 이로써 해방 직후의 절대 가난에서 벗어났고 박제가가 걱정하던 백성들의 빈곤은 사라지게 됐다.

한국이 가야 할 길

2차 세계 대전 이후 해방된 나라 중 경제성장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일부에 불과하다. 이런 극적인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기업을 육성하고 무역과 개방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 뛰어들어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미·중 무역분쟁 속에서 수출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한국은 경제적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 산업 각 부분의 활력도 정부의 규제와 반기업 경제정책 탓에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한국은 박제가의 사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상업과 유통, 자유무역을 강조한 박제가의 뜻처럼 정부의 간섭보다 시장의 자유가 경제를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박제가 정신이 필요한 때다.

정영동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원 jyd54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