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마치 나라를 잃기 직전 구한말과 같은 모습입니다.” 정진택 고려대 총장(58)은 4차 산업혁명의 파고(波高) 속에 한국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바깥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해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36년간 나라를 빼앗긴 고통을 다시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려대 역사상 첫 공대 출신 총장이다. 그가 취임 후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과 ‘실용적 연구를 통한 사회 기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114년 전통의 고려대에서 ‘기술 고대’의 기치를 들어올린 정 총장을 지난 20일 고려대 본관 총장실에서 만났다.
정진택 고려대 총장은 지난 20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상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며 “대학도 실용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정진택 고려대 총장은 지난 20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상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며 “대학도 실용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취임사에서 ‘구한말 세상 변화를 꿰뚫지 못해 식민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며 지금의 상황과 비교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구한말에 일본은 나라를 개방하고 해외 문물을 활발히 받아들인 반면, 우리는 바깥 변화를 직시하지 못해 36년 동안 식민지배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은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예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때 변화하지 않는다면 현상 유지가 아니라 도태하게 됩니다. 과거의 아픔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선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예측하고 그에 맞게 대비해야 합니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혁신을 이뤄낼 ‘창의융합형 인재’를 기르는 데 온 사회가 나서야 합니다.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가치는 결국 우수한 인재가 만들어냅니다. 이를 위해 대학은 캠퍼스 문화를 창의적으로 만드는 데 힘써야 합니다. 고려대도 초학제적 융합교육과 융합연구를 활성화해 시대를 선도하는 학문적 가치와 사회 혁신을 이끌 것입니다.”

▷도약이 필요한 시점에 한국 사회는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복병을 만났습니다.

“부품 소재 기자재 분야는 우리나라가 상당히 열악한 게 현실입니다. 최근 기술 자립을 위한 다양한 정책적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1~2년 안엔 (자립이) 불가능합니다. 의존하던 기술을 개발했다고 바로 자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개발한 기술이 지속적으로 안정성을 갖춰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노하우 축적도 필요합니다.”

▷어려운 기술 자립을 위해 대학들이 많이 나서고 있습니다.

“최근 기술지원단, 위원회 등의 이름으로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대응을 돕는 지원 기구가 대학마다 생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 자립을 위해 투입되는 정부의 정책자금이 대학별로 ‘n등분’돼 ‘0’에 수렴하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어 우려스럽습니다. 대학마다 경쟁력을 갖춘 분야에 특화하는 방향으로 중소기업의 기술 자립에 대한 지원이 이뤄져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학이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요.

“이제 대학의 연구도 ‘실용’의 가치를 적극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동안 대학은 지식의 상아탑으로 불리면서 ‘대학만의 연구’에 몰두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이런 연구 결과가 대학을 넘어 사회에 기여해야 합니다. 실용적인 연구를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

▷고려대 역사상 첫 공과대 출신 총장에 올랐습니다. 이공계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이공계열 교수의 연구를 최대한 지원하기 위해 ‘첨단공공기기원’이라는 기구를 신설할 예정입니다. 고가면서 활용도가 높은 연구 장비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기구입니다. 연구에 꼭 필요한 장비라도 비용을 이유로 A학과는 갖고 있는 반면 B학과는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첨단공공기기원을 통해 각 학과가 갖고 있는 장비를 공유하도록 도와 전체적인 연구 성과를 높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연구 성과를 얼마나 높일지 구체적인 목표가 있나요.

“고려대에서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목표로 준비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큰 교수에게는 연구비를 집중 지원할 계획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논문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상위 1% 연구진을 ‘HCR(highly cited researchers)’이라고 부릅니다. 고려대엔 HCR 교수가 5명 있습니다. 2학기부터 HCR 교수 및 스타 연구자를 매 학기 1~2명 선정해 1억원 씩 지급할 계획입니다.”

▷대학 재정 상황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습니다.

“사립대의 주 수입원은 보통 등록금, 연구비, 재단 전입금, 기부금 등 네 가지로 나뉩니다. 가장 큰 수입원인 등록금은 10년째 이어진 동결정책으로 완전히 묶여 있습니다. 연구비는 늘고 있지만 증가 폭에 한계가 있고요. 재단 전입금이나 기부금은 한국 사회에서 미미한 상황입니다.”

▷전방위적인 재정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대안으로 주목하고 있는 캐시카우는 ‘교원 창업’입니다. 교원이 창업한 기업이 성장하면 고려대는 지분을 보유한 만큼 자금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공과대 출신 총장으로서 교원 창업을 최대한 지원할 계획입니다. 고려대는 이미 교원 창업을 희망하는 교수를 대상으로 재원 마련과 컨설팅을 돕고 있습니다. 또 창업 교수에게는 연구와 기업 운영에 몰입할 수 있도록 안식년이 아니라도 강의를 모두 면제해주고 있습니다.”

▷교원 창업을 비롯해 산학협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고려대는 병원을 중심으로 하는 산학협력, 이른바 ‘학연산병(學硏産病) 협력’에 집중할 것입니다. 그동안 의대 교수들은 강의와 진료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진료에서 나오는 의료 데이터를 연구해 사업화하려는 시도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연구를 통한 바이오메디컬 사업 활성화를 위해 구로병원과 안산병원을 ‘캠퍼스화’하고 있습니다. 강의와 연구가 함께 이뤄지는 캠퍼스 같은 병원 환경을 조성해 교수들이 학연산병 협력의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입니다.”

▷교육 방식에서도 혁신적 변화가 있나요.

“강의형 수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 강의는 교수가 강의실 강단에 서서 앉아 있는 학생에게 강의하는 ‘일방향’ 수업입니다. 그러나 이제 강의 내용은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강의실에선 토론과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플립러닝(flipped learning) 수업이 가능해졌습니다. 일부 인기 있는 과목은 수강생이 500명에 달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꼭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닙니다. 집이나 지하철, 도서관에서도 태블릿 등을 이용해 강의를 들으면서 채팅 형식으로 실시간 질문을 던집니다. 교수는 강의실에 구비된 모니터로 질문을 확인하고 대답해줌으로써 원격 쌍방향 강의를 진행하죠.”

▷고려대를 비롯해 국내 주요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이 정체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국내 대학들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선 글로벌 네트워크를 내실화해야 합니다. 그동안 국내 대학들은 글로벌화를 위해 교환학생 등 외국인 유학생의 양적 성장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화를 위해선 대학원생 교류를 확대해야 합니다. 대학원생이 참가한 연구 결과물이 세계 각지에서 인정받아야 정체된 글로벌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교수들의 국제 공동연구도 활발해져야 합니다.”

▷최근 대학 입시에서 공정성에 대한 논의가 뜨겁습니다. 고려대는 입시제도 개편을 위한 논의를 하고 있나요.

“고려대는 지난해 공론화위원회에서 장시간 논의해 결정한 ‘정시 30%’ 안을 존중합니다. 정시 비중을 마냥 늘리는 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시 비중이 컸던 과거엔 12년 동안 공부한 인생이 하루 만에 결정되는 구조에 대한 비판이 컸습니다. 최근 불거진 입시 문제는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선돼야 합니다.”
[한경 인터뷰] 정진택 고려대 총장 "실용적 연구에 집중…톱 1% 교수에겐 연구비 파격 지원할 것"
정 총장의 '융합인재론'

"다양한 학문·사람 통섭하는융합인재 기르는 게 대학 책무"


정진택 고려대 총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융합 인재’ 양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인재는 새롭게 생각하고, 기존의 생각이나 개념을 조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며 “다양한 배경의 학문 또는 사람을 통섭할 수 있는 융합 인재를 기르는 것이 이 시대 대학의 책무”라고 했다.

정 총장은 융합형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차원의 노력을 교과 영역과 비교과 영역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우선 교과 영역에선 “학생이 다양한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줘야 한다”고 했다. 정 총장은 “기계공학을 배운 학생이 디자인도 배우는 식으로 다양한 수업을 들으면 다각적인 사고를 하는 융합형 인재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며 “고려대는 이중전공과 함께 초학제적 융합전공 운영을 더욱 활성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공부만으로는 결코 융합형 인재가 될 수 없다는 게 정 총장 지론이다. 그는 “열린 사고를 하기 위해선 사회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경험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정 총장은 비교과 영역을 △봉사 △동아리 △창업 및 교환학생, 해외인턴 등 세 가지로 분류해 체험 기회를 적극 제공할 예정이다.

정 총장은 “비교과 영역도 자신만의 포트폴리오에 담을 수 있도록 데이터로 입력하고 취업에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올해 말까지 구축할 계획”이라고 했다.

△1960년 대구 출생 △1979년 성남고 졸업 △1983년 고려대 기계공학과 졸업 △1985년 고려대 기계공학 석사 △1992년 미국 미네소타대 기계공학 박사 △1993년~ 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 △2016~2018년 고려대 공과대학장 겸 공학대학원장 △2019년~ 제20대 고려대 총장

정의진/김동윤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