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싱부터 마약거래까지…범죄용 화폐로 전락한 '문상'
이달 초 서울에 사는 김모씨(20)는 호기심에 들어가 본 ‘랜덤 채팅’에서 황당한 사건에 휘말렸다. ‘예진’이란 가명을 쓴 범인은 자신을 23세라고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대화 수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김씨는 영상통화를 통해 자신의 알몸과 얼굴을 상대에게 보여줬다. 상대는 목소리가 잘 안 들린다며 보내준 파일을 내려받은 뒤 다른 화상채팅 앱(응용프로그램)을 설치하라고 했다. 이후 상대측 협박이 시작됐다. “현재 상황이 모두 동영상으로 녹화됐고, 지인들 전화번호도 모두 해킹됐습니다. 지금 문상(문화상품권) 100만원어치 구입해 핀번호(고유번호)를 보내세요. 바로 답장 안 하면 당장 유포합니다.” 동영상 유포가 두려웠던 김씨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화상품권을 구입해 핀번호를 보냈다. 이후 경찰에 신고했지만 문화상품권은 이미 사용된 뒤였다.

메신저피싱 화폐로 전락한 ‘문상’

서적 등 문화 관련 상품을 구입하는 용도로 발행되는 문화상품권이 메신저피싱, 마약거래 등 각종 범죄의 결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문화상품권은 티몬 등 전자상거래 업체나 편의점 등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데다 사용 내역을 추적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어서다.

문화상품권이 가장 많이 이용되는 범죄는 메신저피싱이다. 구매한 상품권 핀번호는 휴대폰 화면 캡처 몇 번으로 채팅창에서 손쉽게 주고받을 수 있다. 광주에 사는 이모씨(62)는 지난달 대학생인 아들로부터 “친구에게 빌린 돈 30만원을 갚아야 하니 문화상품권을 사서 보내 달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다. 아들은 휴대폰을 잃어버려 학교 공용 컴퓨터에서 메신저 접속을 했다고 설명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과 메신저 말투가 평소와 같아 이씨는 의심하지 않고 편의점에서 문화상품권을 구입한 뒤 상품권 번호를 촬영한 사진을 보내줬다. 이후 집에서 아들을 만난 뒤에야 사기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문화상품권을 이용한 대출 사기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문자 등을 통해 연 2%대 저리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피해자를 유인했다. 이후 전화 통화로 저신용자인 피해자가 저리 대출을 받으려면 대출 한도의 10%는 문화상품권으로 보증금을 내야 한다고 속였다. 경찰 관계자는 “가족 또는 지인을 사칭하거나 대출을 빙자한 문화상품권 피해 사건이 경찰서마다 하루 한두 건씩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며 “요즘은 범죄자들이 만들기 어려운 대포통장보다 손쉽게 현금화(일명 ‘깡’)할 수 있는 문화상품권을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상깡’ 업체도 수십여 곳

경찰 등에 따르면 텔레그램 채팅방에서는 문화상품권을 활용해 마약류를 거래하는 사건도 잇따라 적발되고 있다. 마약 구매자들이 문화상품권으로 대금을 결제하면 필로폰 등 마약류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일명 ‘던지기’ 방식으로 마약을 판매한다. 지난 3월 숙명여대 학생회관 화장실에서 학생들에게 들켜 필로폰을 두고 도주한 김모씨(50)도 문화상품권으로 마약류를 사들였다. 또한 검찰은 필로폰 거래에 쓰인 것으로 확인된 2억원 상당의 모바일 상품권을 추징하기도 했다.

문화상품권은 음란물 거래 등에도 쓰인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작년 9월 자신의 트위터에 “사용하던 스타킹, 양말, 팬티 판매합니다. 선(先)문상 핀 인증 후(後)칼배송”이라는 글을 올렸다. 이 사이트에서만 문화상품권 거래를 통해 음란물을 유통하는 계정이 100여 개가 넘는다.

휴대폰 소액결제를 통해 문화상품권을 구매하고, 현금으로 세탁하는 불법 ‘문상깡’도 버젓이 이뤄진다. 포털 사이트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는 ‘OO캐쉬’ ‘△△티켓’ 등의 상호를 붙인 문상깡 업체들도 20여 개 성행하고 있다. 문상깡은 스마트폰 이용자가 소액결제로 상품권을 구매하고 현금으로 돌려받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문상깡 업자는 10~50%를 수수료 명목으로 뗀 뒤 나머지 금액을 입금해 준다. 현행 정보통신망법은 통신 과금 서비스를 이용해 자금을 융통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경찰 관계자는 “급전이 필요한 청소년들이 자금 조달 수단으로 ‘불법 문상깡’을 한다”며 “학교 폭력과 연관된 경우가 많아 각별히 살펴보고 있다”고 전했다.

수표·카드보다 추적 까다로워

국내에서 유통되는 문화상품권은 컬쳐랜드(한국문화진흥)와 해피머니(해피머니아이엔씨) 등 크게 두 곳에서 발행 및 판매한다. 서점, 영화관, 공연장 등 오프라인 가맹점과 온라인 가맹점에서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다. 상품권의 금액 표시를 긁으면 드러나는 핀번호를 인터넷 사이트에 입력하면 현금처럼 쓸 수 있다.

문제는 핀번호의 유통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이들 업체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가입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지 못한다. 가입자 확인은 휴대폰 실명 확인 등을 통해 할 수 있지만 대포폰을 활용하면 이마저도 피해 갈 수 있다. 경찰 관계자는 “범죄에 이용된 상품권의 핀번호를 등록한 가입자 내역과 인터넷주소(IP)를 받아 수사하고 있지만, 유동 IP로 접속한 경우가 많아 추적하기 어렵다”며 “가입한 이메일이 유일한 단서인데, 허위 이메일을 사용했을 경우 더욱 추적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또 범죄에 이용된 문화상품권의 핀번호를 등록한 사람을 찾더라도 용의자로 특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거래상 등을 통해 핀번호 자체가 온라인에서 거래되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문화상품권은 범죄에 사용됐을 때 수표, 카드보다 추적하기 까다롭다”고 말했다.

따라서 문화상품권도 금융권의 지연인출 제도와 같은 제도적인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등록한 뒤 두 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 사용하게 해 피해자가 범죄에 대응할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련 업체들은 이런 지적에 반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소비자가 온라인에서 쓰기 편하다는 장점 때문에 현금 대신 문화상품권을 사용하는 것”이라며 “상품권 활용의 편의성을 떨어뜨리는 제도를 도입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문화상품권이 범죄에 이용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보완책을 마련하기 위해 관련 업체들과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