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기억해야 할 외국인 독립유공자 70명
1949년 4월 27일 대통령령 제82호로 건국공로훈장령이 제정 공포된 이래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물은 모두 1만5천511명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숱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국권을 되찾을 수 있었고, 이들의 피와 땀을 기반으로 오늘날의 성취를 거뒀다.

여기에는 외국인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적 조서상 '본적'에 외국 또는 미상(활동지가 외국지역)으로 기재된 인물이 89명에 이르는데 러시아 한인 2세인 김알렉산드리아 등 재외동포를 뺀 순수 외국인은 7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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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별로는 중국(33명), 미국(21명), 영국(6명), 캐나다(5명), 아일랜드·일본(각 2명), 프랑스(1명) 순이다.

건국훈장 훈격별로는 1등급인 대한민국장 5명, 2등급 대통령장 11명, 3등급 독립장 34명, 4등급 애국장 4명, 5등급 애족장 13명이고 3명이 건국포장을 받았다.

중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 잡은 지역인 데다 우리와 손잡고 항일투쟁을 벌였기에 독립유공자 수가 가장 많고 훈격이 높은 수훈자가 몰려 있다.

내외국인을 통틀어 대한민국장 수훈자가 30명인데, 이 가운데 외국인 5명이 모두 중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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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화의 아버지' 쑨원(孫文)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적극 후원하고 광둥(廣東)정부 대총통 시절 가장 먼저 임정을 승인했다.

중화민국(대만) 총통 장제스(蔣介石)는 임정과 광복군을 도운 것은 물론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 처칠과 함께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은 윤봉길 의거 후 임정에 거액을 쾌척하고 광복군 창설 때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1910년대부터 신규식 등 독립운동가들을 도와 임정의 기반을 만든 신해혁명 주역 천치메이(陳其美), 조소앙 등과 항일투쟁을 벌이고 임정 자금 지원과 독립군 간부 양성 등에 앞장선 천궈푸(陳果夫)도 건국훈장의 최고 영예를 안았다.

천치메이는 천궈부의 작은아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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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장 수훈자 11명 중에서도 10명이 중국인이다.

조선의용대를 후원한 천청(陳誠)을 비롯해 탕지야오(唐繼堯), 쑹자오런(宋敎仁) 등은 모두 정치가나 군인이고 위빈(于斌)은 천주교 난징(南京)교구장을 지낸 추기경이다.

이밖에도 주칭란(朱慶瀾) 등 정치가나 군인이 대부분이지만 구국일보 주필과 YMCA 편집인을 지낸 황줴(黃覺), 광복군 비밀공작원으로 활약한 대학생 쑤징허(蘇景和), 독립운동가 김성숙의 부인인 임정 외무부 요원 두쥔후이(杜君慧), 한국독립당 당원 리수전(李淑珍)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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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유공자 가운데는 고종의 밀사 역할을 하며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린 호머 헐버트와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선교사이자 주한미국공사로도 활동한 호러스 알렌이 널리 알려졌다.

선교사이자 교육가인 엘리 모리, 조지 매큔, 윌리엄 린튼은 3·1운동에 참여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고충을 겪었다.

린튼은 선교사 유진 벨의 사위이자 인세반 유진벨재단 회장과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미국에서 서재필과 이승만을 돕거나 미국 조야(朝野)에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린 정치인, 변호사, 언론인, 교육자 등이다.

조지 피치는 중국에서 활동하며 김구의 피신을 돕고 국민당 정부에 임정의 승인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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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을 제외한 유일한 외국인 대통령장 수훈자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다.

그는 구한말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해 일본의 침략 기도를 규탄했다.

임정의 무기와 자금 운반을 맡았던 조지 쇼, 의병의 활약상을 소개한 '데일리메일' 기자 프레데릭 매켄지, 고종의 밀서를 주중영국공사에게 전하고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린 더글러스 스토리, 제주 서귀포 서홍성당의 스위니 신부도 영국인 유공자다.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프레데릭 해리스도 본적은 영국이다.

캐나다인으로는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 프랭크 스코필드, 세브란스병원을 세우고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한 의료선교사 올리버 에이비슨,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3.1운동 때 부상자를 치료한 로버트 그리어슨,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독립운동을 도운 스탠리 마틴과 아치볼드 바커가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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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정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좇아 자국의 식민지정책에 반기를 든 일본인도 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2·8 독립선언 주동자, 의열단원 김시현 등을 변호하고 일제에 땅을 빼앗긴 한국 농민들을 도운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다.

후세가 변호한 인물 가운데는 천황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수감돼 사형 선고를 받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있다.

후세의 도움으로 박열과 옥중 결혼한 가네코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1926년 감옥에서 자결해 남편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혔다.

2018년에야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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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인 독립유공자 패트릭 도슨과 토머스 라이언은 천주교 사제다.

각각 제주도의 제주성당과 서귀포성당을 중심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프랑스의 루이 매랭은 파리에서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비판하고 독립운동 후원단체를 조직했다.

외국인 독립유공자들의 공훈록을 살펴보면 공적과 훈격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내국인보다 더 많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정부는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두 명에만 1등 건국공로훈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한 데 이어 1950년 3월 1일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인 11명과 영국인 1명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의중이 깊이 개입된 탓에 상당수는 일반인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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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은 지난 4월 광복회 서울시지부가 마련한 학술강연에서 "외국인 독립유공자 서훈이 객관성을 갖추지 못했고 1960년 이전의 경우 더 심하다"면서 "지금이라도 공적 재심사를 통해 공정한 서훈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도 여성신문 기고를 통해 쑹메이링이 최고 등급 훈장을 받은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을 비판했다.

15일은 74주년 광복절이자 71주년 정부 수립 기념일이다.

동족 중에서도 일제에 빌붙어 일신의 영달을 꾀한 부역자가 적지 않은 터라 한민족의 해방과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외국인들의 노고가 더욱 고맙고 값지게 느껴진다.

이들의 공적이 오래도록 기억되기 위해서라도 외국인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와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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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