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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법조인열전 (23)
외환위기 겪은 'X세대' 사법연수원 27기
1997년 1월. 사법연수원 27기는 PC통신 하이텔 ‘연수원생 열린 마당’ 게시판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당시 신한국당의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 통과와 관련해 누군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에 후원금을 보내자고 제안하면서다. 2주 만에 27기 315명 가운데 180명이 참여해 540만원을 모았다. 후원금 전달은 결국 무산됐다. 연수원 27기 전체 이름을 걸면 안 된다는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27기는 ‘요즘애들’ ‘신세대 기수’란 소리를 들었다. 당시에는 PC통신으로 의견을 나누다가 실제 행동에 나서는 것이 매우 생소하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연수원에 컴퓨터와 프린터가 보급되고 패션과 해외여행에 관심을 갖는 연수생이 급격히 늘어난 즈음이었다.

27기 수료식(1998년 2월) 분위기는 다른 기수처럼 밝지 않았다. 외환위기가 터져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으면서다. 집안 형편이 급작스럽게 어려워지면서 돈을 벌려고 바로 변호사업계로 나간 동기도 여럿 나왔다. ‘더 이상 법조계도 불황의 무풍지대가 아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대형 로펌과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불러 취업설명회를 연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전직 대통령 2명 구속 한동훈…지평 창립 멤버 임성택

MB에 15년형 선고한 정계선 부장판사

27기는 20여 년이 지나 검찰과 법원, 변호사업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 검찰행(行)을 선택한 27기는 이번에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검사장 승진까지 바라보고 있다. 문무일 검찰총장보다 5기수나 아래인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후임으로 파격 발탁되면서다.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는 검사장 후보 ‘0순위’로 꼽힌다. 그는 이명박(MB), 박근혜 두 명의 전직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 기소하는 등 ‘적폐청산 수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을 구속 기소한 전력이 있어 ‘재벌 저승사자’로도 불린다.

한 차장검사는 동기보다 나이가 적어 6반의 A조 총무를 맡았다. 총무는 가장 어린 사람에게 맡겼는데 복사 등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그는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한 차장검사가 검찰로 간다고 했을 때 “(술을 많이 마시는 것으로 유명한) 검찰에서 제대로 능력을 못 펴는 것 아니냐”며 걱정한 동기가 많았다고 한다.

법무부와 대검찰청의 공식 입장을 전달하는 대변인도 모두 27기다. 심재철 법무부 대변인과 주영환 대검찰청 대변인이다. 심 대변인은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을 지내며 가상화폐종합대책을 세웠고, 주 대변인은 대검 중앙수사부의 후신인 부패범죄특별수사단에서 1팀장을 지냈다. 검사장 물망에 올라 있는 정순신 서울중앙지검 인권감독관은 대검찰청 부대변인으로 일했다. 그는 2012년 유진그룹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김광준 당시 서울고검 부장검사를 조사하기 위해 꾸려진 특임검사팀에서 활동했다.

법관의 길을 걷고 있는 27기 가운데는 뇌물수수 등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대통령에게 15년형을 선고한 정계선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가 있다. 정 부장판사는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했고 연수원도 수석으로 마쳤다. 그는 서울중앙지법에서 여성 최초로 부패전담부 재판장에 올랐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5명 중 3명은 명재권, 이언학, 허경호 부장판사가 채웠다. 영장전담판사가 담당하는 구속영장 실질심사는 ‘재판 전 재판’이라는 별칭이 있다. 피의자의 구속과 불구속 여부를 따지는 과정이어서다. 이 때문에 3명의 부장판사는 구속영장 결과를 내놓을 때마다 여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허 부장판사는 ‘재판거래’ 의혹을 받는 유해용 전 재판연구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3600자에 이르는 장문의 이유를 밝혀 주목받았다. 일반적으로는 구속영장이 청구되면 기각 또는 인용을 결정하면서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 등에 대해 한두 줄 적는 것으로 그친다. 법조계에서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를 지휘한 동기인 한 차장검사와 대립각을 세운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특허 전문 변호사로 유명한 유영선

변호사업계에서도 이름을 대면 알 만한 27기가 많다. 지난 3월 법무법인 지평의 경영총괄대표로 선임된 임성택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임 변호사는 법무법인 세종에서 함께 일하던 양영태 변호사(24기)와 함께 10여 명의 변호사를 모아 2000년 지평을 세웠다. 임 변호사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등과 같은 서울대 법대 82학번으로 법대 학생회장 출신이다. 대학에 다니다 학생운동을 이유로 제적됐고, 재입학하면서 동기들보다 2년 늦게 졸업했다.

특허가 전문인 유영선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역전의 명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는 지난해 뇌질환 치료제인 글리아타민과 글리아티린의 상표 다툼에서 글리아타민 측을 대리해 “두 상표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는 승소 판결을 끌어냈다. 항소심에서 패소해 연매출 수백억원짜리 제품이 판매금지 될 뻔한 것을 대법원에서 뒤집었다. 유 변호사는 거푸집의 일종인 ‘갱폼’의 특허권자를 대리해 항소심에서 진 판결을 대법원 파기환송심에서 승소로 뒤집기도 했다.

인수합병(M&A) 분야에서 손꼽히는 변호사도 여럿이다. 윤성조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사모펀드(PEF) 분야 전문가다. 어피너티에쿼티파스너스와 블루런벤처스의 1조원 규모 SSG닷컴 투자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2014년 다음과 카카오 합병도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법무법인 율촌에는 김기영 변호사가 있다. 김 변호사는 STX 현대상선 대우조선해양 등의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법무법인 광장의 문호준 변호사는 MBK의 롯데카드 인수와 LG서브원의 MRO사업 매각 등을 자문했다.

조아란 기자 arc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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