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의 중심 미국 월스트리트와 정보기술(IT)의 메카 실리콘밸리에서는 밤낮없이 일하는 임직원들이 부지기수다. 누구도 이들에게 주 40시간씩만 근무하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하루 13시간씩 일하든 주말에도 출근을 하든 하고 싶은 만큼 일하게 둔다. 고소득 사무직에 대해 근로시간을 제한하는 규정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임금근로자 14.5%, 근로시간 제한 없어

미국은 2004년 ‘화이트칼라 예외적용(white collar exemption)’ 제도를 도입했다. 연소득 13만4004달러(약 1억5882만원) 이상의 관리·행정직과 컴퓨터직, 전문직 등은 법정 근로시간을 40시간으로 규정한 공정근로기준법(FLSA)을 적용받지 않도록 한 것이다. 초과근무를 하면 1.5배의 임금을 줘야 한다는 규정도 이들에게는 관련이 없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화이트칼라 예외적용’을 받는 근로자는 195만 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14.5%에 달한다.

대형 법무법인의 한 대표변호사는 “미국은 돈 많이 버는 사무직에 대해서는 노동시간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해준다”며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미국의 저력은 악착같이 일하는 고부가가치산업 종사자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초봉이 1억2000만원인 대형 로펌의 변호사조차 주 52시간밖에 일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다.

‘화이트칼라 예외적용’이 미국만의 제도는 아니다. 일본도 지난해 6월 ‘고도 프로페셔널 업무 종사자 제도’를 도입했다. 연간 1075만엔(약 1억1725만원) 이상을 받는 금융딜러, 애널리스트, 시스템 엔지니어 등에 대해서는 근로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초과수당을 주지 않도록 했다. 기업들은 고도 프로페셔널 업무 종사자에 대한 건강 확보나 2주간 연속휴일 제공 등의 의무를 갖는다.

미국, 일본과 달리 국회가 지난해 개정한 근로기준법에서는 고소득 사무직에 대한 예외조항을 찾아볼 수 없다. 소득이나 직종과 상관없이 무조건 주 52시간 근로제를 시행해야 한다.
美·日 고소득 사무직, 근로시간 규제 없어…獨·佛은 초과시간 저축
근로시간 저축했다가 꺼내 쓰기도 가능

한국과 달리 세계 주요 선진국은 주 40시간 근로를 기본으로 하되 노사 합의로 다양한 변주를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 등의 ‘근로시간 저축계좌제’가 대표적이다. 초과근무를 하면 그 시간을 저축해뒀다가 필요할 때 한꺼번에 쓸 수 있는 제도다. 근로시간을 한 달 단위로 저축하는 단기계좌에 넣어둘 수도 있고 안식년이나 육아 등을 위해 장기간에 걸쳐 꺼내 쓸 수 있는 장기계좌에 저축할 수도 있다. 장기계좌에 저축할 수 있는 근로시간은 통상 250시간 정도다.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는 프랑스에서도 시행하는 제도다. 프랑스는 노동법이 3000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복잡하고 노동자의 권리 보호에 엄격해 유럽 안에서도 ‘사람 쓰기가 어려운 곳’으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미국 일본 영국 등이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1년만 허용하는 데 반해 프랑스는 산별협약에서 허용할 경우 최대 3년까지 확대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란 3개월이든 6개월이든 단위시간 안에서 평균 근로시간을 법정 근로시간에 맞춰 운영하는 제도다. 한국의 탄력적 근로시간은 기본이 2주일이고, 노사가 합의하면 3개월까지 가능하다.

유럽연합(EU)은 2003년 노동법 지침을 고쳐 주평균 48시간 근로를 원칙으로 하되, ‘노동자가 원하면 초과근무가 가능하다’는 예외 규정을 마련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로시간 규제는 블루칼라(제조업) 노동자에게 적합한 제도인데 한국에서는 전 산업에 걸쳐 일률적으로 시행하려 한다”며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근로시간을 더 유연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백승현/박종서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