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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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 먹자골목에 있는 맛집에서 만나자는 말을 듣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가게 소개는 물론 흔한 식사 후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주소만 들고 먹자골목 중간 지점에서 안쪽으로 들어가 잠시 헤맨 끝에 골목 한쪽에서 ‘남도맛집’이란 간판을 찾았다. 말 그대로 ‘숨은 맛집’이었다.

식당에서 김순구 한국감정평가사협회장(60)이 반갑게 맞았다. 얼마나 오래된 단골인지 물으니 “이제 4~5개월 됐다”는 답이 돌아왔다. “성일종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충남 서산시태안군) 보좌관의 소개로 알게 됐는데 앞으로 계속 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남도음식점이지만 사장님이 서산 분이에요. 서산에서 식재료를 직접 조달해 음식을 만듭니다. 고향(충북 괴산) 생각도 나고, 제철 식재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자리를 잡자 고추무름, 묵은지, 부추김치, 소라고동 등 갖은 반찬과 보글보글 끓는 바지락탕이 식탁에 올랐다. 뜨끈한 탕 국물이 속을 시원하게 달래줬다. 이어 엄나무 끓인 물에 토종닭과 녹각, 대추, 마늘 등을 넣고 푹 끓인 해천탕이 등장했다. 사장이 직접 팔뚝만 한 낙지를 냄비에 넣었다. 김 회장은 “저번엔 문어였는데 이번엔 낙지가 나왔다”며 “그때그때 식재료에 따라 음식도 달라지는 점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가난 벗어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

구수한 해천탕 국물을 마신 뒤 낙지를 초장에 찍어 먹었다.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해산물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김 회장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라고 답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 해산물은 귀한 식재료였다. 그는 “괴산군 사리면은 내륙인 데다 전기도, 차도 없었다”며 “집이 너무나 가난해 생선 같은 건 구경도 할 수 없었다”고 떠올렸다. 보광초 백마분교를 다닌 그는 학교에 빈 도시락을 가져갔다. 학교에서 점심 때 강냉이죽을 줬고, 하교할 때 한 번 더 담아줬다. 강냉이죽으로 하루 두 끼 배를 채운 것이다. “아버지가 6·25전쟁 당시 포로로 잡혀간 뒤 후유증으로 여섯 살 때 돌아가셨어요. 먹고 살기 힘들었죠. ‘가난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정말 앞만 보며 달려왔습니다.”

가난했지만 김 회장은 구김살 없이 활동적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는 축구선수, 중학교 때는 연식정구 선수로 활약했다. 테니스에서 파생된 연식정구는 말랑말랑한 고무공을 사용한다. 김 회장은 “당시 주니어 국가대표로 선발돼 일본에 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운동을 하면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반드시 오전 수업을 들은 뒤 오후에 운동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음성군 수봉초로 전학을 가자마자 전교 1등을 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중학교 3학년 때 운동특기생으로 대구 농림고 등에 갈 수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권했다”며 “그때 운동특기생으로 고등학교를 갔다면 체육 교사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한동력 지심정성(無限動力 至心精誠)’

김 회장이 감정평가사협회장으로 오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계속된 실패와 거듭된 도전 속에서 길을 찾아왔다. 나이로 보면 78학번인 김 회장은 80학번을 달았다. 그는 “서울대에 가려고 3수를 했다. 종로학원에 다닐 때도 독서실 운영을 맡는 조건으로 학비 50%를 면제받았다”며 “대학도 국립대 학비가 낮기 때문에 사립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문이 열리지 않자 그는 당시 정부에서 추진한 특성화 공대로 눈을 돌렸다. 충북대는 건설, 전북대는 전자, 전남대는 화학, 부산대는 기계 이런 식으로 특성화 공대를 키워 관련 산업 인력을 확보하겠다는 취지였다. 연고가 있는 충북대를 택한 김 회장은 자연스럽게 건설산업 분야로 들어섰다. 그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당시 할 수 있는 건 고시 공부밖에 없었다”며 “군 제대 후 복학하자마자 모든 걸 끊고 기술고시에만 매달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술고시도 끝내 김 회장에게 합격증을 내주지 않았다. 2년간 도전했지만 2차 시험에서 6등을 했다. 선발인원은 5명이었다. 이때 그와 함께 시험을 본 사람이 국토교통부 제1차관을 지낸 뒤 지난 3월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사장에 오른 손병석 씨다. 김 회장은 “당시 손 사장이 기술고시 수석을 했고, 손 사장 부인도 합격했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시간이 흐른 뒤 한국감정원 재직 시절 국토부 차관이던 손 사장을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김 회장은 “그 후로 지금까지도 손 사장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낸다”고 말했다.

가정형편상 기술고시에 다시 도전할 수 없었던 그에게 지도교수가 추천서 하나를 내밀었다. 과에서 성적이 1등이던 그에게 교수가 한국감정원 입사를 권한 것이다. 김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해준 큰형님도 입사를 권했다”며 “그렇게 감정원에 입사한 뒤 15년을 몸담았다”고 말했다.

해천탕 속 낙지와 닭 한 마리를 해치우자 칼국수가 등장했다. 김치만두도 접시에 담겨 나왔다. 얇은 피 속에 꽉 찬 속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김 회장이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 나이가 42세였다. 대학 때 운동권에 몸담았던 그가 감정원에서 노조위원장을 맡은 것이 계기였다. 그는 “원래 자격증을 딸 생각이 없었는데, 노조위원장 재임 후 승진에서 누락됐다”며 “당시 원장이 ‘감정평가사 자격증이 없어 자격증이 있는 동기와 함께 승진시켜줄 수 없다’고 말한 것에 자극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김 회장은 연월차 휴가를 한 번에 몰아 40여 일의 시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책을 들고 절에 들어가 공부했다. 김 회장은 “당시 사내에 ‘노조 일을 한 사람은 자격증을 딸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며 “하지만 시험에 합격했고, 유일한 노조위원장 출신 감정평가사가 됐다”고 설명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 직접 지은 좌우명이 있어요. 바로 ‘무한동력 지심정성’이죠.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노력한다. 마음을 다해 집중한다는 뜻인데요. 나중에 보니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말이 가장 비슷하더군요.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공시가격 산정업무 감정평가사에게 맡겨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꾸덕꾸덕하게 말린 조기구이가 나왔다. 맥주 안주로 제격이었다. 감정평가사의 매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2002년 감정원에서 퇴사한 김 회장은 이듬해 충북 청주에 개인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지방에 있다 보니 주로 보상평가업무를 했다”며 “감정평가를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 평가 관련 업무를 설명해주고 보상과 관련한 민원을 해결해줄 때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3월 감정평가사협회장에 당선됐다. 김 회장은 “2016년 감정평가 3법(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 부동산 가격공시에 관한 법률, 한국감정원법) 제정 이후 업계의 어려움을 타개해야겠다는 절박함을 안고 출마했다”며 “임기 3년 동안 감정평가 3법 개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을 전문가 시각에 맞도록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또 ‘한국감정원법’에서 ‘감정’이라는 용어를 제거하고 유사평가행위를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부동산 가격공시에 관한 법률’은 조사·산정을 조사·평가로 일원화하는 것이 목표다.

그는 한국감정원법 개정을 통해 공시가격 산정을 감정평가사가 맡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토지는 감정평가사가 평가하고, 주택 및 공동주택은 한국감정원 직원들이 조사·산정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처럼 감정평가사가 아니라 감정원 직원들이 공시가를 산정하는 나라는 없다”며 “전문가를 투입해 들쭉날쭉한 공시가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감정평가사협회는…

[한경과 맛있는 만남] '마부작침' 되뇌며 감평사 합격
한국감정평가사협회는 공정한 감정평가 업무 수행을 위해 설립된 국토교통부 산하 법정단체다. 1976년 한국공인감정사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범했다. 감정평가사의 전문성 제고, 감정평가 기법 개발 등을 통해 국민 재산권을 보호하고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대만, 태국, 싱가포르 등의 해외 감정평가사협회와 업무협약을 맺으며 국제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김순구 한국감정평가사협회장 약력

△1959년 충북 괴산 출생
△1978년 충주고 졸업
△1987년 충북대 건축학과 졸업
△1992년 전국금융사업노동조합 한국감정원지부 노조위원장
△2000년 감정평가사 11기
△2013년 대화감정평가법인 대표이사
△2014년 한국부동산연구원 이사
△2017년 서강대 부동산경제 석사
△2017년 한국감정평가학회 부회장
△2017년 이용득·김두관·이동섭 국회의원 정책특보
△2018년 수원대 도시부동산학 박사과정
△2018년 한국감정평가사협회 회장
[한경과 맛있는 만남] '마부작침' 되뇌며 감평사 합격
김순구 회장의 단골집 남도맛집

서산 제철 해산물로 만든 보양식 '해천탕' 인기

[한경과 맛있는 만남] '마부작침' 되뇌며 감평사 합격
서울 마포구 토정동에 있는 남도맛집은 한정식 전문점이다. 충남 서산에서 매일 아침 받아오는 재료로 제철음식을 선보인다.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 내부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제철음식을 만드는 식당인 만큼 메뉴는 계절마다 바뀐다. 지금은 해천탕이 주로 나온다. 해천탕은 닭과 낙지, 홍합, 가리비 등을 넣고 끓인 여름철 보양식이다. 비린내가 전혀 없고 담백하며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한방토종닭도 인기 메뉴다. 해천탕과 비슷하지만 녹각, 대추 등 각종 한약재를 넣은 게 특징이다. 가을이 되면 서산에서 잡아 올린 꼬막, 전어 등 해산물이 나온다. 겨울과 봄철에는 주꾸미 요리를 선보인다.

소라고동 고추무름 묵은지 파김치 바지락탕 등 20여 가지 밑반찬이 닭고기와 어우러져 풍미를 더한다. 대부분 서산에서 올라온 식재료로 만들어진다. 가격은 4인 기준 12만원, 2인은 8만원이다.

최진석/양길성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