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타계

趙 회장 일가 경영권 박탈 겨냥
수사기관·국민연금 등 전방위 압박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타계한 8일 서울 서소문동 대한항공 사옥에 조기(弔旗·오른쪽)가 걸려 있다. 임직원들은 이날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타계한 8일 서울 서소문동 대한항공 사옥에 조기(弔旗·오른쪽)가 걸려 있다. 임직원들은 이날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경찰과 검찰 등 11개 기관이 이 잡듯이 수사를 했죠. 조양호 회장과 가족들이 포토라인에 선 것만 14번이에요. 대한항공 대표이사에서도 쫓겨나듯 물러났고요.”

8일 타계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한 재계 원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술을 거의 안 마시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던 사람이 얼굴이 아주 초췌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1년 새 압수수색 18회·가족 공개소환 14회…"주총 후 병세 급속 악화"

11개 기관에 포위당한 한진가(家)

조 회장과 한진그룹은 지난해 4월 조 회장의 막내딸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 사건 이후 1년여간 경찰과 검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국토교통부, 고용노동부 등 11개 기관으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수사를 받아왔다. 조 회장을 비롯해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 첫째 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둘째 딸 조 전 전무 등은 수차례 공개소환조사를 받았다. 대한항공 등 계열사들은 수사기관으로부터 18차례나 압수수색을 당했다.

전방위적인 수사로 건강이 악화된 조 회장은 지난해 12월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건너갔다. 수술과 요양으로 조금씩 건강을 찾는 듯했다. 일상적인 업무 보고도 받곤 했다.

국민연금 압박이 결정타

수사 기관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국민연금이 나섰다. 행동주의 펀드 KCGI에 가세해 경영권 흔들기에 동참했다. 국민연금이 사실상 ‘조씨 일가의 퇴진’에 초점을 맞췄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지난달 27일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내 이사 연임안이 국민연금 등 주요 주주의 반대로 부결된 이후 호전됐던 조 회장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고 한진그룹 측은 전했다. 평생을 바쳐온 대한항공에서 쫓겨나듯 물러나게 된 것에 대해 충격이 컸다는 후문이다.

이와 관련,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페이스북 글에서 “연금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문재인 정권의 첫 피해자가 오늘 영면했다”며 “문재인 정권은 국민의 노후 생활을 보장하라고 맡긴 국민연금을 기업을 빼앗는 데 악용했다”고 비판했다.

검찰 등의 전방위적 수사·조사에도 불구하고 사전구속영장이 받아들여진 한진가 오너는 한 명도 없다.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은 작년 10월 조 전 전무의 물컵 사건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특수폭행·업무방해죄에 무혐의 결론을 냈다. 폭행죄에 대해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 공소권이 없다고 판단했다. 조 전 전무는 그해 3월 광고업체 관계자가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자 소리를 지르며 유리컵을 던졌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땅콩 회항’ 이후 잠잠했던 ‘대기업 갑질 논란’이 다시 불 붙었다.

수사기관들은 여론에 편승해 한진을 전방위 포위하기 시작했다. 작년 4월 대한항공과 광고대행사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주)한진과 정석기업, 조 회장의 서울 평창동 자택 등 압수수색만 18번 이뤄졌다. 검찰 등은 △법무부 필리핀 가사 도우미 불법 고용 △진에어 불법 등기이사 등재 △밀수와 관세 포탈 △약사법 위반 및 횡령 △폭언 폭행 등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 등을 조사했다.

수사주체도 검찰과 경찰에서 관세청, 법무부 서울출입국외국인청, 국토부, 고용부, 국세청 등 특별사법경찰권을 가진 전 부처로 확산됐다.

“막내딸 포토라인 설 때 마음 아파해”

대대적인 수사에도 성과는 크지 않았다. 물컵 갑질은 수사 7개월 만에 무혐의로 끝났다. 검찰과 경찰은 다섯 차례 구속영장을 신청하거나 청구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가사 도우미 불법 고용 혐의도 이 전 이사장은 불구속기소되고, 조 전 부사장은 약식기소되는 데 그쳤다.

그럼에도 수사기관의 ‘공개적 망신주기’ 관행은 거듭됐다. 작년 5월 1일 서울강서경찰서의 조 전 전무 공개 소환을 시작으로 조 회장의 경우 네 차례, 이 전 이사장은 다섯 차례, 조 전 부사장은 네 차례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조 회장의 아들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을 제외한 전 가족이 14차례 카메라 앞에 섰다. 조 회장과 친분이 있는 한 경제계 원로는 “무혐의로 끝난 막내딸(조 전 전무)이 혐의와 관련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조 회장이 가장 마음 아파했다”고 전했다.

관세청은 조 회장의 평창동 자택을 압수수색하면서 “외부인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식의 발언으로 대형금고 같은 ‘비밀의 방’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런 시설은 없는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피의사실 공표와 포토라인 세우기는 심야수사와 함께 없어져야 할 ‘수사악습 3종 세트’”라며 “포토라인은 중세 마녀재판 행태와 다를 게 없다”고 지적했다.

조 회장 타계로 관련 재판과 수사는 모두 중단되거나 연기됐다. 조 회장의 270억원 규모 횡령·배임 혐의 재판을 맡은 서울남부지법은 이날 공소 기각 결정을 내렸다. 서울남부지검도 조 회장에 대한 조세포탈 혐의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이날 종결했다. 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릴 예정이던 이 전 이사장과 조 전 부사장의 가사 도우미 불법 고용 혐의 관련 재판은 다음달 2일로 연기됐다.

안대규/이인혁/조아란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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