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마약 밀수하다 걸린 중국인 "경찰이 한국어로 '미란다 원칙' 고지했다"며 무죄 주장
중국인 피의자가 내민 ‘회심의 카드’
재판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란 예상은 뜻밖의 암초에 걸렸다. A씨 측이 꺼내든 카드는 바로 ‘미란다 원칙’. 중국인이라 한국어로 고지된 미란다 원칙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미란다 원칙이란 형사소송법에 따라 용의자를 구속하기 전 묵비권이나 변호사 선임권 등 피의자에게 보장되는 권리를 알려주는 것이다. 수사기관이 이를 사전에 고지하지 않으면 용의자의 자백이나 증거는 재판에서 배제된다.
A씨는 8년 동안 인력사무소에서 일용직 출퇴근 차량의 운전 기사로 일했음에도 법정에서 한국말을 못한다고 우겼다. 법원 관계자는 “외국인이 미란다 원칙을 이해 못한다는 이유로 증거능력을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 것은 처음 봤다”며 “재판을 진행하던 판사조차 당황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A씨는 마약 사건 외에 폭행으로 민사 손해배상청구소송도 당했는데, 지난 1월 원고 측 변호사와 협의하던 중 ‘합의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한국말을 모른다”고 답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공소 유지에도 차질이 생겼다. 최악의 경우 현장에서 발견된 총포나 마약류가 모두 증거로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 피고인 측은 또 경찰이 증거물을 압수할 때 압수물 내역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고 최종 서명만 강요했다는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최근 ‘버닝썬 게이트’로 가뜩이나 경찰의 부실수사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데 체포 당시의 ‘사소한 실수’로 마약사범을 놓아주게 되면 또다시 경찰 책임론이 불거질 게 뻔했다.
어머니 접견 중 실수가 낳은 반전
재판 중반까지도 A씨의 완전범죄가 현실화될 것이란 비관적인 예상이 팽배했다. A씨가 한국말을 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거짓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일까. A씨는 구치소를 찾아온 어머니와 접견을 하던 중 “민사 사건의 원고 측 변호사가 찾아왔는데 내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했더니 그냥 돌아갔어”라고 말했다. 한국말을 할 줄 안다는 정황이 드러난 셈이다. 검찰은 해당 대화가 포함된 녹음 CD와 녹취록을 증거로 제출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지난 20일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A씨에게 징역 1년 유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한국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또 압수물 품종과 수량이 기재된 목록에 피고인이 서명할 때 충분히 어떤 물건이 압수됐는지 알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끝으로 “수사기관이 형사소송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지 않고 수집한 증거는 원칙적으로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면서도 “다만 수사기관의 절차 위반 행위가 실질적인 피의자 인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고 증거능력 배제가 오히려 형사 사법정의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법원은 증거를 채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
-
기사 스크랩
-
공유
-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