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의 한 대학교 복사실에 불법 복제된 서적이 책꽂이에 가득 꽂혀있다.
수도권의 한 대학교 복사실에 불법 복제된 서적이 책꽂이에 가득 꽂혀있다.
‘헌법학 1만3000원, 전략경영론 1만2000원, 비평이론 8000원…’

18일 수도권의 한 대학교 캠퍼스 내 복사실은 한쪽 벽면 책꽂이 전체가 불법 제본된 책들로 빼곡했다. 이들 책에는 관련 강의와 교수 이름, 가격 등이 적혀 있었다. 3월 새학기가 시작된 후 교내 복사실은 이처럼 불법 복제된 교재를 사려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이날 스프링으로 제본된 서적을 구매한 대학생 임모씨(21)는 “친구들끼리 모여 이곳에 주문하면 수업 교재를 정가의 반값에 살 수 있다”고 전했다.

◆단속 피해 화장실에 책 숨기기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보호원은 대학교 개강을 맞아 3월을 ‘대학교재 불법복제 행위 집중단속 기간’으로 정하고 4일부터 단속에 나섰다. 그럼에도 대학가에선 여전히 불법 제본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려대 인근 한 복사업체는 단속을 피해 불법 제본한 서적들을 화장실에 보관 중이다. 이 업체 직원 A씨는 “저작권이 있는 책들이라 이렇게 모두 숨겨놓아야 단속을 피할 수 있다”고 털어놨다.

한국저작권보호원에 따르면 지난해 2학기 기준 대학교재 불법복제 경험이 있는 학생은 전체의 51.6%에 달했다. 정부의 집중 단속에도 불법 복제가 만연한 것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은 대학생 입장에서 교재 구매 비용을 크게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 강모씨(26·4학년)는 “한 학기에 전공 과목만 5~6개 수강해야 하는데 원서 한 권당 최소 5만원이 든다”며 “모두 정가로 구매하면 적어도 30만원 이상이어서 대학생 입장에서 부담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복사실 직원이 단속을 피해 숨겨놓은 불법 제본된 서적들을 정리하고 있다.
복사실 직원이 단속을 피해 숨겨놓은 불법 제본된 서적들을 정리하고 있다.
◆학생 위해 발벗고 나선 교수들

출판사 허락 없이 책을 복제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할 때 단속과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대학 교수들도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원서 대신 교수가 직접 작성한 파워포인트(PPT)나 강의노트로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서울 소재 한 사립대 교수는 “교수들도 원서 가격이 학생에게 큰 부담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학생 비용 부담을 덜어주면서 양질의 강의를 제공할 수 있는 PPT를 제작하는 것도 교수의 능력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전했다. 아주대에 재학 중인 유모씨(25)는 “교수들이 PPT로 강의하는 경우가 많아 굳이 원서를 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교수가 직접 공동구매를 주선해 합법적으로 전공 서적을 싸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례도 있다. 안주홍 한양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출판사로부터 개정판 이전 버전의 재고를 염가에 대량 구매해 학생들에게 싼값에 판매한다. 안 교수는 “기초 학문의 경우엔 개정판과 개정 이전의 서적 내용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없다”며 “교수들이 저마다 출판·번역의 경험으로 쌓은 출판사와의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충분히 개정 이전의 전공 서적 재고를 싸게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기존 수강생들이 사용한 책을 학기말에 싸게 매입한 뒤 다음 학기 수강생들에게 재판매하기도 한다. 교수 스스로가 중고 서점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는 “교수 개인이 중고 서점 역할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캠퍼스 내 서점에서 중고서적을 사고 파는 문화가 정착돼 있는 만큼 우리 정부도 비슷한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의진/이현진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