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는 3·1절 당일 남북공동행사는 무산됐지만, 기념일 이후라도 북측과 협의를 통해 공동행사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22일 밝혔다.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3·1운동 10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평양공동선언이 이행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백 대변인은 "3·1절 공동기념식 행사가 열리지 않은 것이고, 3·1운동 100주년과 관련한 기념행사 전체가 무산되는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다.앞서 북측은 21일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조명균 통일부 장관에게 보낸 통지문을 통해 "3월 1일에 하는 공동기념행사는 이번에 어렵겠다"고 통보해와 당일 공동행사는 무산된 상황이다.정상 간의 합의사항임에도 북측이 난색을 나타낸 것은 다음 주로 다가온 2차 북미정상회담 준비로 여력이 없기 때문으로 알려졌다./연합뉴스
독일, 1차세계대전 패전 후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등 국내 혼란기'제국 열강' 이탈리아는 日과 특수관계…1차대전 종전후 비밀협정 체결※ 편집자주 = "조선 독립 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우리 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습니다.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습니다.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습니다.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습니다.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습니다.하지만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습니다.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습니다.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窓)을 통해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연합뉴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포진한 특파원망을 총동원해 당시 외신 보도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보도합니다.지금까지 3·1운동을 보도한 외신 일부가 부분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세계 주요국 별로 보도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관련기사>[외신속 3·1 운동] ①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 [http://www.yna.co.kr/view/AKR20190207090000009?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② 日언론엔 '폭동'뿐…총독부 발표 '앵무새' 전달 [http://www.yna.co.kr/view/AKR20190213157000073?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③ 상하이서 첫 '타전'…은폐 급급하던 日, 허 찔렸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4084600097?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④ 韓人 여학생이 띄운 편지, '대륙의 심금'을 울리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08154700089?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⑤ 샌프란發 대서특필…美서 대일여론전 '포문' 열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4006800075?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⑥ 美 타임스스퀘어에 울려퍼진 독립선언…세계가 눈뜨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5013400072?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⑦ WP "선언문 든 소녀의 손 잘라내"…日편들던 워싱턴 '충격' [http://www.yna.co.kr/view/AKR20190216018300071?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⑧ 러 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도 주목…"조선여성 영웅적 항쟁" [http://www.yna.co.kr/view/AKR20190217045600080?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⑨ '영일동맹' 허울에 英언론 日 '받아쓰기' 그쳐 [http://www.yna.co.kr/view/AKR20190212161500085?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⑩ 일제 치하서 울려퍼진 佛혁명가 '라 마르세예즈' [http://www.yna.co.kr/view/AKR20190218002100081?input=1195m]서구권에서 3·1 운동에 대한 보도가 활발히 이뤄진 미국과 프랑스 등과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관련 보도를 찾기가 어렵다.독일에서는 전후 맥락의 파악이 어려운 두 줄짜리 '자투리' 기사, 이탈리아에서는 3·1 운동으로 인한 일본의 통치 정책변화 발표를 '받아쓰기'한 기사 정도가 현재까지 발견된 보도 내용이다.유럽의 주요국으로 언론이 발달했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3·1 운동에 대한 작은 팩트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셈이었다.명확한 인과관계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극심한 내부 혼란을 겪었고, 이탈리아는 당시 일본과 특수관계였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독일에서는 3·1 운동과 관련해선 당시 수도 베를린에 기반을 둔 '도이체알게마이네차이퉁'의 기사가 최근 발견됐다."한국의 소요사태는 진압됐다.그곳은 다시 평온하게 됐다"는 내용이다.제목도 없는 단 두 줄짜리 기사다.3·1 운동이 일어난 지 21일이 지난 후인 1919년 3월 22일자에 보도됐다.그것도 도이체알게마이네차이퉁의 런던특파원이 3월 9일자 도쿄발 로이터 통신을 인용한 기사였다.당일 총 6면의 신문 지면 중 이 기사는 정치 섹션의 마지막인 3면 하단에 몇 개의 단신과 함께 섞여 있었다.독일 뷔르츠부르크대(University Wuerzburg) 중국학과의 고혜련 초빙교수(Prof. Heyryun KOH)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당시 독일의 주요 언론 보도를 조사했지만, 3·1 운동에 관한 기사는 도이체알게마이네차이퉁의 두 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고 교수는 독립기념관의 용역을 받아 당시 베를린 등 주요 도시에서 발행된 10여개의 신문에서 개항기와 일제시대 등을 배경으로 한국 관련 기사를 조사했다.독일은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한국에서 일어난 주요 독립운동 상황에 대해 사실을 주로 전달해왔다.헤이그 특사 3인의 활동과 고종의 퇴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등에 대해서도 보도했다.의병 활동에 대한 기사도 나오고 한일합병 이후 언론탄압이 시작됐다는 보도도 이뤄졌다.을사늑약에 대해선 비판적인 시선이 담기기도 했다.더구나 독일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이던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 지역 진출을 노렸고, 한국에 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결국, 독일은 1897년 칭다오가 포함된 산둥반도의 자오저우완 일대를 점령하고 함대 기지를 칭다오에 건설하기도 했다.그러나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자오저우완 일대를 일본에 빼앗겼다.일본에 대한 독일 측의 감정이 고울 리가 없는 셈이다.하지만, 3·1 운동 당시 독일은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처지였다.그해 1월 독일 사회주의 혁명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일어났다가 실패로 돌아갔다.이 과정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여성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당하고 베를린 운하에서 시체가 발견된 후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됐다.고 교수는 "당시 독일 신문의 내용을 보면 국내 문제 보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외신의 비중이 떨어졌다"고 말했다.이탈리아에선 밀라노에서 발행되는 주요 신문이었던 '코리에레델라세라'에서 3·1 운동 관련 내용이 등장했다.3·1 운동이 발생한 지 6개월 가까이 지난 8월 23일 코리에레델라세라 지면에서다.런던발로 실린 이 기사는 "도쿄에서 일본 왕이 발행한 교서에 따르면, 한국에 '자치'(Home Rule)이라는 개혁안의 혜택을 주는 자치를 부여한다.민간인 총독이 군사 총독을 대체할 것이며, 민간 경찰이 헌병을 대체할 것이다.또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릴 것이다"라는 내용이다.조선총독부가 한국에 자치권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다.3·1운동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3·1 운동을 계기로 군대와 헌병에 의한 무단 통치를 하던 조선총독부가 정책을 변화했다고 알린 셈이다.여기에 '개혁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일본의 무자비한 탄압과 이에 대항한 한국민들의 처절한 외침에는 고개를 돌린 채 일본 측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한 셈이다.이탈리아 언론의 이런 태도는 당시 국내외 상황과 맞물린다.이탈리아 역시 제국주의 열강 중의 하나였다.아프리카의 리비아, 에리트레아 등에 식민지를 만들었다.피식민지인 한국이 일본에 저항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사건을 예의주시할 수 있지만,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저항한 거대한 물결이었던 3·1운동을 공개적으로 보도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특히 이탈리아는 1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과 특수관계에 놓여 있었다.이탈리아는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일본이 비밀협정을 체결한 나라 중 하나였다.일본은 당시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반도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맺고 물밑 외교전을 펼쳤다.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에 앞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3국 동맹을 체결했으나 전쟁 초기에 중립을 선포했다가, 1915년에 연합국에 가담해 승전국의 일원이 됐다./연합뉴스
佛 신문 1919년 5월 보도…"한국학생들 독립 시위하며 라 마르세예즈 합창"일간 뤼마니테 "일본 의회서도 가혹한 통치가 시위 촉발했다는 비판론"'식민 종주국' 佛 언론·정부, 3·1운동 전개에 촉각…파리강화회의 영향 주시※ 편집자주 = "조선 독립 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우리 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습니다.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습니다.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습니다.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습니다.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습니다.하지만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습니다.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습니다.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窓)을 통해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연합뉴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포진한 특파원망을 총동원해 당시 외신 보도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보도합니다.지금까지 3·1운동을 보도한 외신 일부가 부분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세계 주요국 별로 보도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관련기사>[외신속 3·1 운동] ①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 [http://www.yna.co.kr/view/AKR20190207090000009?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② 日언론엔 '폭동'뿐…총독부 발표 '앵무새' 전달 [http://www.yna.co.kr/view/AKR20190213157000073?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③ 상하이서 첫 '타전'…은폐 급급하던 日, 허 찔렸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4084600097?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④ 韓人 여학생이 띄운 편지, '대륙의 심금'을 울리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08154700089?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⑤ 샌프란發 대서특필…美서 대일여론전 '포문' 열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4006800075?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⑥ 美 타임스스퀘어에 울려퍼진 독립선언…세계가 눈뜨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5013400072?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⑦ WP "선언문 든 소녀의 손 잘라내"…日편들던 워싱턴 '충격' [http://www.yna.co.kr/view/AKR20190216018300071?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⑧ 러 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도 주목…"조선여성 영웅적 항쟁" [http://www.yna.co.kr/view/AKR20190217045600080?input=1195m][외신속 3·1 운동] ⑨ '영일동맹' 허울에 英언론 日 '받아쓰기' 그쳐 [http://www.yna.co.kr/view/AKR20190212161500085?input=1195m]"한국의 학생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시위하며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노래했다."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발행된 프랑스 신문 '알제의 메아리'는 1919년 5월 9일자에서 "젊은 한국인들이 라 마르세예즈를 노래했다.한국의 옛 수도 Sonds(개성)에서 200명의 호스톤 여자기숙학교 학생들이 3월 1일 처음으로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신문은 이 소식이 서울에서 '중국의 목소리'로 보내진 서신에서 언급됐다고 소개했는데, '중국의 목소리'는 당시 극동 문제를 주로 다룬 프랑스 신문이었다.한국 학생들이 불렀다는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혁명 직후인 1792년 4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하려 했을 때 알자스지방에 주둔하던 공병대 대위 루제 드 릴이 작사·작곡한 행진곡이다."일어서라 조국의 젊은이여, 영광의 날은 왔다.자아, 진군이다.놈들의 더러운 피를 밭에다 뿌리자" 등 조국을 침탈하려는 무리에 대해 호전적이고 혁명정신을 고취하는 가사로 유명하며 지금도 프랑스의 국가로 불린다.3·1운동에 참여한 한국의 학생들이 프랑스의 혁명과 전쟁의 역사로부터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은 정황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3·1운동 당시 개성의 여학생들이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는 사실은 프랑스의 원로 한국학자 마크 오랑주 전 콜레주드프랑스 한국학연구소장이 과거 논문에서 밝힌 적이 있지만, 국내 학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또 다른 프랑스 신문 '르 라디칼'도 앞서 그해 3월 20일자 신문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심각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고 전했다.'급진적인'이라는 뜻의 제호를 가진 이 신문은 "서울의 소식을 전하는 출판물이 도쿄에서 현재 금지됐으며 3월 1일부터 한국에서 일어나는 시위는 한국의 국가적 독립을 목표로 조직된 운동의 일환이다"라며 비교적 객관적으로 3·1운동을 알렸다.특히 이 신문은 "기독교로 개종한 한국인들의 주도로 대규모 운동이 촉발됐다"고 보도해 3·1운동에서의 개신교도들의 역할에 주목하기도 했다.신문 '악시옹 프랑세즈'도 3월 20일 상하이발(發) 로이터통신 기사를 인용해 3·1 운동 소식을 신속히 전했다."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서울의 거리를 뛰어다녔다.수백명은 한국의 황제(고종)의 시신이 있던 궁까지의 길을 열어젖히고 한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다.특히 학생들이 돋보였다.서울에서 수백명이 체포됐지만, 경찰서도 습격당했다.서울과 의주, 진남포에 군대가 소집됐다"고 전했다.신문은 특히 "이 심각한 사태는 (파리) 강화화의에서 (열강들이) 한국의 독립을 제재한 뒤 널리 퍼진 여론에 의해 일부 촉발됐다"고 써 당시 열강들의 식민지배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3·1운동 촉발에 영향을 줬다는 점을 짚었다.1차대전 직후 승전국들이 파리에 모여 전쟁재발 방지와 식민지 문제를 논의한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는 당시 열강으로 연합국 편에 있었던 일본에 밀려 논의 대상에서 끼지 못했었다.프랑스 일간지 뤼마니테(L'Humanite)는 4월 13일자 상하이발 기사에서 3·1운동을 '혁명'이라고 칭했다."한국의 독립운동이 여전히 강고하게 지속되고 있다.일본 당국이 가혹한 탄압을 하고 있으며 혁명의 희생자 수가 이미 상당하다."이 신문은 이어 4월 20일 통신사 '라디오'의 보도를 인용한 후속 기사에서는 일본 의회에서도 3·1운동이 일본의 가혹한 통치방식에 의해 촉발됐다는 목소리가 있다고 전해 눈길을 끈다.신문은 "한국에서의 조사 이후 의원들이 의회에 한국의 혁명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면서 "의원들은 일본이 한국에 적용한 통치방식에 의해 사태가 촉발됐으며, 한국인들은 언론의 자유의 완전한 억압과 빈곤층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엄청난 세금의 희생자들"이라고 전했다.뤼마니테가 식민지국가들의 해방 투쟁에 호의적인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처럼 일본에서조차 가혹한 통치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음을 전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이밖에 '자유인'이라는 뜻의 프랑스 신문 '옴 리브르'와, '르 골루아' 등이 로이터통신을 인용해 3·1운동의 전개상황을 연이어 보도했다.자국 신문들의 보도와 별도로 프랑스는 정부 차원에서 일본과 중국의 언론들에 비친 3·1운동 동향을 공보(bulletin) 형태로 꾸준히 정리해 놓았다.가령, 프랑스 외교·전쟁부는 1919년 4월 1일자 중국 정기간행물 공보에서 중국 언론의 보도와 일본 정부의 공식 설명을 인용해 3·1운동의 전개상황을 상세히 소개했다.프랑스 외교부는 "3·1 운동 지도부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며, 윌슨의 원칙(민족자결주의)을 자신들의 불행한 조국에 적용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이어 "윌슨의 프린스턴대 제자인 이승만이 이를 위해 뛰고 있으며 김 박사(김규식)와 안씨(M. An)라는 두 한국 대표와 파리에서 합류한다"고 덧붙였다.프랑스 정부가 중국과 일본 언론 동향에서 한국 상황을 이처럼 예의주시하는 것은 당시 인도차이나 등지에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렸던 식민모국으로써 식민지해방투쟁의 확산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특히 프랑스는 1차대전의 주요 승전국으로, 당시 자국에서 열리고 있던 파리강화회의의 의제설정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던 터라 3·1운동을 무시할 수 없던 처지였다.재불 독립운동사학자 이장규씨(파리 7대 한국학 박사과정)는 "프랑스는 3·1운동의 영향이 인도차이나로 번지는 것을 우려하는 한편, 강화회의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우리 대표단의 호소를 묵살했다"면서 "일본의 왜곡된 선전에 편승한 몇몇 언론이 3·1운동을 평가절하하기도 했지만 많은 프랑스 언론이 비상한 관심으로 상당한 양의 보도를 쏟아냈다"고 설명했다./연합뉴스